고려의 대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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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13세기 동아시아 세계에 존재했던 '천하관'의 일종.중국이 유일한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 군주가 천명을 받은 천자국이듯이 고유의 토풍을 지닌 여러 나라들도 각 천하(소천하)의 중심이 되어 병존한다는 사상이다.
2. 탐구
2.1. 전기 고려의 사례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 전기에도 이러한 사상이 주류였다는 의견이 일부 있다. 이에 따르면 전기 고려는 이 같은 천하 다원론을 독자적인 해동천하관으로 구현하여 신성 혈통을 부여받은 용의 후손이자 해동 세계의 주인인 고려의 군주가 중원의 천자와 구별되는 해동의 천자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관념을 구체화 시켰다. 또한 자국의 군주를 '해동천자(海東天子)' , 그외 각국의 군주를 '송조천자(宋朝天子)', '거란주(契丹主)', '금주(金主)' 등으로 지역명을 덧붙여 지칭함으로써 그 세계를 명확히 구별하였다.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고려는 중화제국과의 수직적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율적-자존적인 다원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보았다.[1] 고려시대 천하관은 고려 군주의 천자-황제 위호 사용에 관한 입장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다만 고려시대의 천하관은 단 한가지만 존재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에 따르면, 고려시대 천하관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첫번째는 고려 군주가 천자라는 입장이고 두번째는 유교적 명분론과 현실적 이유를 들며 고려 군주가 천자를 칭해서는 안된다는 입장 마지막 세번째는 다른 중원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도 독자적 천하(소천하)를 가진 천자국이라는 입장이었다.[2]
이처럼 천하관은 한가지가 아닌 여러 갈래들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고려의 경우에도 크게 3가지의 천하관들이 공존하였다.
첫번째는 자국중심 천하관으로 이는 자신의 나라를 온 천하의 중심국으로 보는 입장 또는 그렇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자국 중심의 천하관은 고대부터 존재했던 오랜 관념으로서 고려시대에도 남아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자국중심 천하관에는 토속신앙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두번째는 화이론적 천하관으로서 화이론적 천하관을 가진 이들은 중화문화를 선진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토속문화는 낙후한 것으로 간주하고 혁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화이론적 천하관에서는 고려를 중화의 변두리에 위치한 ' 夷'로 간주하여 중국에 대한 명분론적 사대를 주장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동시에 중국 문화는 선진 문화로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토속 문화는 비루한 구습으로서 반드시 혁파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세번째가 바로 다원적 천하관인데 일원적 천하관을 전제하는 자국중심적-화이론적 천하관들과 달리, 다원적 천하관은 여러개의 소천하들이 병존하고 고려의 천자가 송-요-금의 천자와 마찬가지로 그 중 하나의 소천하를 지배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다만 다원론자들도 주변 강대국과는 사대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보았으며[3] 실제로 고려 전기에 '중국 왕조'와의 조공책봉관계를 보면 '외왕' 방면에서는 국왕(국가)의 대외적인 위상은 시종일관 제후(국)였다. 정확히 당대 고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外臣제후(국)였으며 당시 고려와 '중국 왕조' 사이의 대외 관계는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관계 속에서 고려 국왕은 외국의 군주이면서 황제의 신하(제후)로 규정되고 있었다.[4] 즉, 다원적 천하관이라 할지라도 아예 조공-책봉 질서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모습은 아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전기 고려는 다원론적 천하관을 채택하여 자신들만의 소천하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외왕내제를 채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5] 다만, 전기 고려가 실제로 외왕내제를 채택한 게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기 어려운데 대표적으로 천자와 황제 같은 호칭들 보다는 왕으로 지칭한 경우들이 훨씬 더 많다는 문제점[6] 탓에 천자나 황제 같은 해당 용어들이 실제로 외왕내제라는 확고한 목적의식 하에서 사용된게 맞는지에 대해서는 학계내에서 논쟁( 고려/외왕내제 여부)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원 복속 이전의 고려는 중국 왕조와는 대외 방면에 한해 군신 의례를 매개로 결합하였을 뿐이었고 그리하여 국내적으로는 제후(신하) 위상이 의미 없었으며 중국 왕조로부터의 독자성을 의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독자성은 당연시된 채 향유되었다. 그러다 원 복속기를 분수령으로 하여 국가(국왕)의 자기 정체성의 설정 방식은 혁명적으로 변화하였다. 원 복속 하에서 고려는 국내적으로도 ‘신하+군주’ 위상의 구현과 제후국 체제의 실현 그리고 외신제후이면서 황제의 관료와 황실의 부마이기도 한 위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고려는 자신이 ‘보통의 오랑캐’와는 달리 중화 문명(문화)을 추구·구현하였고 그로 인해 원의 천자를 정점으로 한 천하 질서를 수용․긍정시하며 천하 질서 내에서 자신의 위상인 이적 세계의 제후(국)라는 본분을 다하고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정당화하였다. 다만 당시 자기 정체성을 설정하는 방식은 피동적, 현실 추수적 면모를 뚜렷이 노정하였다. 원 복속기에 성립된 자기 정체성의 기본 틀은 그 이후 시기까지 존속하였지만 원 복속기와는 달리 고려말기와 조선초기를 경과하면서 내향적, 자기 신념적 면모가 대두·강화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였다. 즉 종족과 공간의 측면에서 이적이기는 해도 여타 이적들과 달리 문명 중화를 ‘주체적이고’ 철저히 추구하였고 그 일환에서 국내에서조차 중화 천자의 제후라는 위상을 ‘주체적으로’ 견지하고자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 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국문초록.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 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국문초록.
또한, 고려 전기의 다원론적 천하관은 원 간섭기에 고려가 제후국으로서의 위상을 강요받으면서 점차 축소되어 갔으며 오히려 성리학의 도입으로 화이론이 점차 확산되어 나가면서 원 간섭기 이후로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7]
[1]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
[2]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
[3]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
[4]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
[5]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
[6]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 ;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최종석,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
[7]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