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피어트'의 주요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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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피어트 Neil Peart OC[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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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닐 엘우드 피어트 (Neil Ellwood Pe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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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2년
9월 12일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주 해밀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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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20년
1월 7일(향년 67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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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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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968 ~ 2015 | |
소속 | 러시 | |
직업 | 뮤지션, 송라이터, 레코드 프로듀서 | |
장르 | 하드 록,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재즈, 스윙 | |
악기 | 드럼 |
1. 개요
닐 피어트는 캐나다의 록 밴드 러시의 드러머로 캐나다의 뮤지션이다. 무시무시한 규모의 드럼셋과 그 세트의 모든 구성품을 아우르는 연주능력, 그리고 그에 따른 드러머로서의 굉장히 높은 명성, 그리고 탁월한 작사 능력으로 유명하다.[2]2. 생애 및 활동 내역
2.1. 일생
1952년 9월 12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해밀턴 외곽 지역에서 글렌 피어트와 베티 피어트 부부 아래에서 2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3] 어린 시절 처음으로 배운 악기는 의외로 피아노였는데, 그렇게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나무젓가락으로 집안의 물건들을 두드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닐의 부모님은 그런 닐에게 드럼스틱과 연습용 드럼 하나를 사주시면서 1년 동안 열심히 하게 되면 키트를 사주시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후 14살 생일 때 마침내 드럼 키트를 받으면서 Peninsula Conservatory of Music에 다니며 드럼레슨도 받게 된다. 이후 여러 밴드를 전전하며 여기저기서 공연하다 18살 때 잉글랜드 런던으로 가서 프로 뮤지션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허나 밴드에서 활동해도 보석상에서 보석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야할 정도로 닐의 커리어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런던에서 18개월을 지내는 동안 자신의 작사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객관주의 철학자 겸 소설가 아인 랜드(Ayn Rand)의 작품을 접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캐나다로 돌아와 아버지가 일하시던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게 되었다.이후 피어트는 캐나다의 도시 중 하나인 세인트 캐서린스(St. Catharines)에서 활동하던 밴드 J R Flood의 드러머로 고용된다. 그러던 중 지인이 러시의 드러머 오디션에 참가할 것을 피어트에게 제안한다.
2.2. 러시
전임 드러머 존 룻세이(John Rutsey)이 지병인 당뇨병 때문에 탈퇴하자 새 드러머를 구하기 위해 러시는 오디션을 개최했고, 게디 리와 알렉스 라이프슨이 심사를 맡았다. 피어트는 이 오디션에 참가했고,[4] 스스로는 별로 좋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다만 리와 피어트는 음악과 독서 측면에서 비슷한 취향을 공유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5]이후 피어트는 1974년, 하드 록 밴드 유라이어 힙(Uriah Heep)과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맨프레드 맨스 어스 밴드(Manfred Mann's Earth Band)의 오프닝을 맡은 러시의 미국 투어부터 참여하면서 정식으로 러시의 드러머가 되었다.
2.3. 사망
현지시각 2020년 1월 7일, 안타깝게도 교모세포종으로 67세에 세상을 떠났다. 2012년 Clockwork Angels를 끝으로 정규앨범을 발매하지 않고, 2015년을 끝으로 정식 은퇴를 한 지 약 5년 후에 피어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6] 재클린 테일러와 딸 셀레나 피어트의 곁으로 떠나게 되었다.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피어트의 사망 후 SNS에 추모의 글을 남겼다.
"우리는 전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과 유산은 캐나다, 그리고 전세계의 음악 애호가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고인 닐 피어트의 명복을 빕니다."
참조3. 음악적 특징
닐 피어트는 보통 드러머의 3배 규모의 드럼키트를 자유자재로 다루고,[7] 통상적인 드럼키트에 다양한 악기들을 추가해서 다채로운 소리를 만들어 갔다.[8]초기에 키스 문에게 영향을 받은 닐 피어트는 이후 60~70년대의 드러머 진저 베이커, 카마인 어피스, 존 본햄에게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스타일을 흡수했다. 드러머로서는 존 본햄, 코지 파웰 등에 가려지는 감도 있지만, 연주자 출신들은 닐 피어트가 저들을 능가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디테일한 테크닉 면에서는 확실히 저들을 능가하는 듯. 디지털 드림 도어에서 선정한 위대한 록 드러머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또한 닐 피어트는 최고의 실력을 갖췄음에도 항상 겸손을 잃치 않은 드러머로 손꼽힌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테크닉을 배가하기 위해 기존에 잡았던 매치드 그립에서 재즈 드러머들이 잡는 레귤러 그립으로 잡을 때 처음부터 다시 드럼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기본 스트로크부터 연습했다고 한다.
장비의 측면에서는 초기에는 Slingerland 사의 드럼과 Zildjian 심벌을 썼고, 1979년부터 1985년 즈음까지는 Tama 사의 드럼을 썼으며, 1987년부터 1995년 즈음까지는 Ludwig 드럼을 썼다. 이후 1996년부터는 DW 사의 드럼을 썼으며, 2004년부터는 Zildjian 심벌이 아닌, Sabian의 심벌을 사용하였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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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인터뷰에선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활발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앞에서 상당히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앨범 사진 같은데선 많이 웃고 있지만 공연장에서는 늘 무표정인 것도 그의 이러한 내성적인 성격 탓이 크다고 한다. 어릴 때 부터 하체 관절이 안 좋아서 여느 캐나다 아이처럼
아이스하키 같은 것도 못한 채 집에서
독서를 하며 보냈고 덕분에 어느 그룹에도 잘 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람들과 어울릴 목적으로
드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낯을 가리는 성격이 여전했다는 것. 이런 성격 때문에 닐 피어트는 러시의 새 드러머 오디션을 보러갈 때도 많이 걱정을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러시 밴드 멤버들과 기본적으로 사이는 좋지만 그렇게 같이 어울려다니진 않은 듯하다. 러시 인터뷰 때도 게디 리와 알렉스 라이프슨은 참여했지만 늘 혼자만 빠져있을 때가 많고, 제일 극단적일 땐 다른 멤버들은 전용기를 타고 이동하는데 본인만 바이크를 타고 이동을 했다.
혼자가 편해
- 가정사도 매우 안타까운데, 1997년 외동딸 셀레나 테일러 피어트(Selena Taylor Peart)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으며 이듬해 아내 재클린 테일러(Jacquelin Taylor)마저도 병사하였다. 이 때 엄청난 충격을 받은 닐 피어트는 이를 극복하는데만 거의 6-7년이 걸렸고, 나머지 멤버들은 개인 활동은 하였지만 닐 피어트가 돌아 올 때까지 러시로서 그 어느 활동도 하지않았다. 피어트는 딸의 장례식장에서 밴드 멤버들에게 "난 은퇴했다고 생각해줘.(Consider me retired)"라고 잠시 부탁했다고 한다.
- 신장이 193cm(6피트 3인치)로, 상당한 장신이다. #
[1]
Officer of the Order of Canada. 캐나다의 국익을 신장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훈장.
[2]
그의 드럼 실력은 록 드럼의 신이라고 불리는
레드 제플린의
존 본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는 평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세심한 기술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존 본햄을 능가한다는 평도 존재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다.
[3]
닐이 두 살 되던 해 가족이 세인트 캐서린스(St. Catherines)라는 지역으로 이사를 하여 닐의 동생들은 모두 그곳에서 출생하였다.
[4]
참고로 오디션 참가 당시 오래된
포드 핀토 차량에 드럼세트를 통째로 실어왔다고 한다.
[5]
예상 외로 라이프슨이 피어트에게서 별다른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고...
[6]
첫 번째 아내
[7]
전면에 어쿠스틱 드럼이 있고, 후방에 전자드럼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규모가 무서울 정도로 크다...
[8]
처음부터 규모가 컸던 것은 아니고, 밴드가 2112 앨범 이후 흥행가도를 계속하면서 에이전시나 밴드 멤버들 역시 큰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이것 저것 추가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닐 피어트가 장비를 추가하는 동시에 게디 리도 신디사이저를 도입하면서 사운드를 더 풍부하게 만들고 덩달아 알렉스도 기타를 더 변태급으로 어렵게 연주하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