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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2 00:27:31

나이토(스코어러)

파일:ZBL-NAI.png

1. 개요2. 행적

1. 개요

일본 슈팅 게임 스코어러. 한자로는 内藤라고 표기, 항목명인 나이토는 内藤의 일본식 발음이다. 하이스코어 엔트리를 남길 때 사용하는 이니셜은 NAI. 사용하는 이니셜의 유사성 때문에 NAL과 동일 인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이토와 NAL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GKK-ROD가 공개한 자료( 백업)에 따르면 1980년에 소학교 1학년이라고 하며 1학년때 인베이데 게임에서 6만점을 달성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출생년도를 계산해보면 1973년(생일이 4월 1일 이후일때) 혹은 1974년생(생일이 4월 1일 이전일때) 둘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화려한 스코어러로서의 이력( 백업)

GKK-ROD가 본인 트위터에서 푸는 썰들을 보면 그 정도면 당시 기준으로도 웬만한 스코어러는 전부 씹어먹고 다니는 수준이다. GKK-ROD 고등학생일 시절 아르바이트를 했을 시절 그가 아르바이트 하던 오락실에선 그라디우스 3의 입고가 늦었는데, 이때 마침 우연히 놀러온 나이토에게 테스트 플레이를 의뢰하였는데 첫플레이만에 3-5 보스전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당시 이걸 하이스코어로 신청했다면 완전한 무결점이지만 정작 본인은 테스트 플레이라고 하면서 하이스코어 집계 신청 권유를 거절했다. 그라디우스3의 스코어 집계가 이뤄질 시기가 1990년까지인걸 생각해보면 압도적이다. 링크, 아카이브

나왔다!! 트윈비에서 초회전일은 마사시의 2-5였지만 이미 그 시점에선 나이토는 2주 ALL은 달성했으며 연습에서도 최소한이 2-6 도달이었다. 집계마감일에 자전거로 본인이 주로 하던 오락실로 가서 플레이를 했으나 첫 플레이때부터 1-3을 진행하던 도중 지병인 발작이 도져서 플레이를 단념하였다. 돌아오던 때 GKK-ROD는 결과가 뽑힌 코시가야(越谷)에서의 기록을 신청하면 어떠냐고 권유하였지만 본인은 홈그라운드인 스가모(巣鴨)에서 기록을 찍는것에 집착하였다고 한다. 링크, 아카이브

그리고 진보쵸에서 행해지던 바츠군SP의 로케테스트 현장에서 나이토가 바츠군SP를 플레이하자 제작사인 토아플랜이 플레이 소감을 물어보자 조금 어렵다고 하자 정식 발매때 난이도가 하향되었다고 ( 아카이브)

GKK-ROD에 따르면 이보다는 더 강렬한 에피소드는 많으나 이를 오픈하는건 본인이 원치 않으나 GKK-ROD는 저 두가지 일화만큼은 나이토의 명예를 위해서 말하려고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어디까지나 빙산의 일각이며 이는 GKK-ROD가 보유하고 있는 나이토의 영상 내역이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영상 목록마저도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하다

2. 행적

유세미가 슈팅게임에 입문하기 한참 전의 시절에 베지타[1], 오사다 선인 등과 함께 슈팅게임의 신으로 이름을 떨친 플레이어다. 생긴 건 좀 통통하고 온화하게 생겼다.[2] 어찌 보면 지금의 유세미가 탄생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플레이어다. 이 사람이 세운 기록으로 인해서 유세미가 슈팅 게임에 입문하고 후일엔 유일한 STG의 신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3] 또 당대의 여러 슈퍼 플레이어들에게 존경하는 플레이어를 물으면 꽤나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BGR-44가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여간에 각설하고 이 사람의 슈팅과 관련된 행적으로는 돈파치 4400만 오버, 그리고 후술할 도돈파치에서의 7.19억(C타입 부문)독보적 행보 및 새턴판 스코어 어택 캠페인 우승[4], 타츠진오 4주 진출[5], 배틀 가레가 가인부문 최종 1769만( 게메스트 1997년 4월호, 당시 전일), 도돈파치에서 항상 독보적인 스코어를 기록함과 동시에 최초로 6, 7억 돌파, 그라디우스 IV 유세미보다 더 빨리 카운터 스톱을 2번이나 달성. 그리고 은퇴한 슈터 취급을 받던 2004년에 악마의 게임으로 통하던 하챠메챠 파이터의 카운터 스톱 등이 있다.

인간이 아니다. 달인왕의 경우 실수로라도 미스가 나면 사실상 재기가 불가능해서 고수들조차도 실수로 미스가 나면 그 즉시 손을 놓는 게임으로 유명한데 이 사람은 미스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성공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돈파치 4,400만 점은 2달 정도만 파서 달성한 기록이라고 한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현재 돈파치의 국내 전일이 3,994만 점에 육박하는데 이게 약 2~3년에 걸쳐서 얻어낸 기록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런 대기록을 2달 정도만 파서 찍어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 이 사람이 도중에 종료하지 않고 계속해서 돈파치를 팠을 경우 그 기록은 알아서 상상해 보자.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오사다 선인과의 맞대결이 제대로 이루어져 기록 경쟁도 훨씬 볼 만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6]

이후 도돈파치에서도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당시 최초로 6억과 7억을 돌파하는 등 당시 도돈파치에서는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을 정도이다. 또한 도돈파치에서 최초로 6, 7억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답게 히바치 발악 노봄도 이 사람이 가장 먼저 달성하였다. 사실 1차 형태도 2루프째에는 모두 회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봄이 없어 기합회피했는데 다행히도 잘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잔봄0의 힘

참고로 도돈파치에서 처음으로 올클을 했을 시의 이 사람의 스코어는 3.24억(잔1, 1주 1.21억)이다. 공략 속도도 인간의 경지가 아닌데 하치 대면에는 1주일 정도만 걸렸으며 히바치 클리어는 20일 정도나 걸렸다. 물론 사전에 컨티뉴 플레이를 통해서 히바치의 공격들을 전부 조사하는 등 탑 스코어러라는 명칭이 아깝지가 않다. 저런 노력들이 도돈파치에서 독보적인 스코어를 기록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어찌되었든 사실상 인간의 수준이라고 보기 힘든 공략 속도다.

게메스트의 도돈파치의 공략 비디오의 제작에 이 사람이 참여하였는데 담당은 C타입이다[7] 이 사람의 영상은 C-S타입 6.38억(잔4, 2주 류코와 하치에서 1미스씩, 히바치 노미스, 발악 노봄) 영상이다. 이쯤 되면 할 말을 잃을 지경이지만 더욱이 놀라운 건 저게 10번 정도 플레이를 해서 나온 기록이라고 한다. 물론 수록 전에는 연습을 했다고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 10번만에 저게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외의 경지라는 소리. 또 하나 놀라운 건 저 영상의 수록이 단 이틀 정도만 걸렸다는 점이다. 거봐, 외계인 맞네[8][9]

그리고 1999년 2월, 최초로 도돈파치에서 7억을 돌파하였다(잔5). 그리고 얼마 후에 소속 클랜인 SOF에서 이 사람이 7억을 돌파한 기념으로 도돈파치의 공략 비디오를 발매하였다.

여담이지만 도돈파치를 종료할 당시 나이토가 찍은 스코어는 7.19억이다. 원래는 6.83억을 내고 종료하였으나 같은 클랜원인 WTN이 6.94억(기체는 C-S)을 내면서 갈아버리는 바람에 복귀해서 7.19억을 찍고 다시 종료.[10] 이후 현재 C타입 전일인 아게구모가 4년만에 이 기록을 갈았는데 도돈파치를 접었던것인지 복귀하지 않았다.

도돈파치로 데뷔한 유세미를 졸지에 콩라인으로 만들어버린 일화도 유명하다. 실제로도 유세미가 3억을 내면 그는 4억을 냈고 유세미가 애써 4억을 내면 5억을 돌파하고, 5억을 내면 6억을 내는 이런 기만질악순환이 반복되었다.[11] 결국 유세미가 최종으로 6,8억을 냈으나 이후 다시 7억을 내며 실패. 결국 유세미는 나이토를 제치지 못했다.

이렇게 반복되니 당시 신인이었던 유세미가 좌절감을 느낄 만하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당시 이 사람의 포스는 지금의 유세미를 생각하면 된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유세미의 행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좋든 싫든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이 외에도 1988년경 그라디우스2에서 나이토라는 이름이 확인되고 있다. 이 사람이 가끔 스코어네임을 NAI라 적지 않고 코멘트 중간이나 뒤쪽에 나이토라고 적을 때도 있는데 그때와 스코어네임 형식에 유사성이 발견되며 한자와 거주지가 일치하는 걸로 봐서 동일인물인 듯하다. 참고로 이 당시의 나이토는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점수는 천만점을 달성하면서 해당 부문(총 3부문 8, 9, 12월) 집계 종료.[12] 2004년에는 하챠메챠 파이터 카운터 스톱 달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2010년 5월엔 BGR-44의 오프모임에서 WTN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타츠진오 영상을 상영한 WTN과 달리 영상 상영은 하지 않은 듯.

하이스코어러로서는 은퇴한건 사실이고 이때문에 슈팅게임도 접은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슈팅게임은 여전히 하고 있는 모양으로, GKK-ROD가 공개한 자료( 아카이브)에 따르면 2012년작인 도돈파치 최대왕생을 플레이하여 오버플로우를 일으키는 영상까지 촬영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보이는 영상만 해도 GKK-ROD가 가지고 있는 영상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는 2012년작인 최대왕생에서도 오버플로우를 띄울 수 있는 폼을 가지고 있다는게 핵심으로 재활만 하면 하이스코어에 복귀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그 스크린샷에서 보이는 미신청 전일리스트란 제목의 xls파일은 덤)

어떤 이가 동영상의 타이틀만 봐도 경악이지만 제일 아래에 있는 엑셀파일이 쩐다고 하자 GKK-ROD가 답변을 했는데 그 리스트는 여러모로 위험하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는 리스트라고 하며 나이토는 하이스코어판에서 발이 넓은데다 전일을 따는 것보단 인간관계를 중요시 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성과를 뽑고서도 신청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쨋든간에 50을 눈앞에 두고 있는 2022년 현재도 모습만 드러내지 않았을뿐 지금도 슈팅 게임을 플레이 하고 있는걸로 여겨진다.
[1] 2ch 슈팅판과 일본에선 슈팅신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모양. 국내에서 유명한 기록으로는 라이덴 1, 2 1000만점 오버가 있다.[13] 그리고 타츠진오에서는 9달 동안 독주하던 이 사람의 기록을 나이토가 가는 등 맞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다음달에 다시 베지타가 갈긴 했지만 두 달 후에 또다른 플레이어에게 기록이 갈리면서 이 게임에서 베지타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말았다(베이직 매거진 기준). [2] 그런데 이 사람도 인간은 인간인지 슈팅게임을 하면 '젠장' 을 외치며 빡친다고 한다. 역시 누구나 악마가 되는 슈팅게임 [3] (2001년 아르카디아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유세미 曰) 「그러던 어느 날 아키하바라의 TRY tower에 있는 스코어 보드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NAI씨의 2-5 하이 스코어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저는 '와, 저사람 진짜 대단한데? 나도 저런 스코어 한 번 내보고 싶다!' 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4] 스코어는 506,797,380점이며 나머지 플레이어의 스코어가 2억이 안됐다는 점은 실로 충격과 공포. 상품으로 일명 청판 혹은 청벌이라 불리는 특별기판을 받았다(타이틀 화면이 붉은색 계통이 아닌 파란색 계통이다). 정식 명칭은 캠페인 버전. [5] 위에서 언급한 나이토의 기록은 3-5까지 진출에 374만. 게메스트 쪽에서는 4-5 진출 기록이 확인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기록 달성 시기도 시기이거니와 저 기록들이 당시 전일 기준(다시 말해 더 나은 기록이라도 달성 당시 전일이 아닌 기록들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이 사람의 실력을 볼 때 지금은 그 이상도 가능할 듯하다. 그리고 1000만은 보통 8주까지 가야 나오는 점수이며 8주까지 가기 전에 달성한 WTN도 7-4에서 달성했다(아쉽게도 09년에 낸 거라 7주차에서 돌파했다는 사실 말곤 의미가 없지만). 종전에 이 각주에 언급되어 있던 나이토의 영상은 2주. 고로 1000만은 단순히 나올 수 없는 수준을 넘어 택도 없는 구간. 참고로 최초 달성자인 SPK는 8-2(!!!)에서 달성했으며 당시 잔기는 2. SPK의 코멘트에 따르면 세번째 1000만 오버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도 1000만점을 달성한 적이 있는 듯. [6] 사실 여기서도 맞대결 자체는 딱 한 번 이루어졌지만 선인의 경우 지리적 요건으로 인한 입하 시기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이뤄졌다곤 보기 어렵다. 일단 이 한 번의 대결에서는 나이토가 승리하였지만 계속 팠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본인들도 장담 못 할 듯하다. [7] A타입과 B타입은 오사다 선인이 담당했다. 스코어는 A타입 6.03억, B타입 4.77억. 자세한 건 오사다 선인 항목을 참조. [8] 사실 이 양반은 도돈파치 7억 오버 기념으로 공략 비디오를 발매하였다. 이쪽은 소속 클랜인 SOF에서 판매했던 동인 비디오. 최초 돌파 시점의 플레이(7.02억)랑 C-S 7.10억 영상이 수록되었다. 오마케로 수록될 예정이던 1주 2.14억, 히바치 147히트 영상은 재생시간상의 문제로 WTN의 청판 비디오에 실리게 된다. 검은 막대기가 주기적으로 보이는 현상(옛날 모니터에선 제법 익숙할 그 막대기인 듯) 때문인지 후에 발매된 WTN의 청판 영상과는 달리 리핑된 영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쪽도 오마케는 리핑된 영상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나이토의 영상이라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듯하다. 감상에 크게 방해가 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남에도 그대로 판매한 이유는 WTN의 영상을 찍을 때와 달리 그걸 교정할 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9] 한때 국내에서 이 7.1억 영상의 정체가 7.19억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으나 어떤 분이 해당 비디오를 구입한 뒤 실물을 확인해본 결과 7.19억 영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10] 1주 점수는 WTN보다 살짝 낮다. [11] 유세미 曰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보니 언제나 그의 뒤를 쫓아가는 격밖에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2] 다른 부문에 비해 천만점 달성이 유별나게 빠른 건 아니다. 나머지 부문 중 두 개는 각각 8, 12월에 천만점을 달성했으며 남은 하나만 89년 3월에 달성. 그래도 두 부문 이상 최초 천만점 달성에 성공한 사람은 이 사람 뿐이라는 것에서 이 사람의 강렬한 포스를 느낄 수 있다. 그라2에서 칸스토를 달성할 당시의 나이토는 고등학생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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