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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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摠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백제의 장군으로 순천, 여수 지역의 호족.2. 생애
김총(金摠)은 공식적으로는 생몰년 미상이나 순천 김씨 종친회에서 이야기하는 바로는 825년 신라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되면 후백제 건국 당시 나이가 지나치게 많게 되어 연대가 잘 맞지 않는다. 견훤이 867년생이고 창업이 892년이며 후백제 국호를 사용한 것이 900년으로 825년생이라면 이미 70대라는 것이다.태봉의 왕 궁예의 손자라는 이설도 있다. 궁예의 손자가 어떻게 후백제의 장군이 되었는지를 추정한 글에 따르면 왕건의 나주 공방전 당시 왕손인 김총도 왕건을 따라 출전하였고 왕건이 철원으로 귀환한 후에도 나주에 있던 도중 왕건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견훤에게 귀순했던 것이라 본다. # 그러나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태봉의 왕손 정도 되는 중요인물에 대한 기록이 왜 정사에는 남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을 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후백제에서 인가별감을 지냈다. 견훤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벼슬을 맡았던 것을 보아 견훤의 심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많은 공을 세워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순천(順天)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순천 지역에서는 김총을 진례산의 산신인 순천성황신(順天城隍神)으로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순천 지역의 호족으로 박영규가 있었고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이자 후백제의 중견세력으로 활약하고 고려에서도 왕의 장인어른[1]이 될 정도의 대호족이었기 때문에, 김총은 보다 작은 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인근 지역이자 신라 말 당시 순천에 소속된 영현이었던 여수 진례산 등지에도 김총과 관한 구전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여수 반도 지역의 호족이었을 수도 있다. 그의 후손이 순천 김씨인 것도 당시 여수가 순천의 속현이었기 때문에 순천을 관향으로 삼았을 수 있다.
유명한 후손으로는 조선 초기의 재상인 김종서, 왜란과 호란 정국의 중요 인물들인 김여물- 김류- 김경징의 3대, 한화그룹 총수인 김승연 일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