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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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乂 / 王乂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삼국시대의 호족.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 일대인 명주의 호족이었다.신라 태종 무열왕의 후손으로, 과거 신라 중앙의 왕위 다툼 때 원성왕에게 밀려나 명주(강릉)로 와서 자리잡은 김주원 집안의 인물이다. 훗날 고려에 귀부하는데 공을 세워 왕씨 성을 하사받게 된다.[1]
2. 생애
그의 생애 전반부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같은 명주에 또다른 호족 왕순식이 있었는데 그의 휘하였는지 별개 세력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 강릉에서 발견된 보현사 낭원대사탑비에 의하면 그의 세력은 집사낭중, 원외랑, 색집사 등 나름의 관직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중소 호족들을 휘하에 거느린 어느 정도 끝발날리는 중견 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후삼국시대를 끝마치는 일리천 전투에서는 같은 명주의 왕순식과 함께 마군 20,0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한편 왕건이 전국 호족과 정략결혼을 맺는 과정에서 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니 그녀가 바로 14비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이다.
고려에서 도령(都領) 좌승(佐丞) 내사령(內史令) 관직을 지냈다. 보현사 낭원대사탑비에 그의 이름이 있어 후삼국통일 이후 940년까진 살아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측되나 이후 행적은 기록의 부재로 인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