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5:14:04

김재훈(농구)

김재훈의 수상 및 영예
{{{#!folding [ 펼치기 · 접기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1998
(선수)
1999
(선수)
2007
(선수)
2010
(코치)
2013
(코치)
2014
(코치)
2015
(코치)
}}} ||
대한민국의 농구인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재훈 모비스 수석코치.jpg|width=100%]]
<colbgcolor=#eeeeee,#191919> 김재훈
金在勳
출생 1972년 9월 3일 ([age(1972-09-03)]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93cm| 체중 105kg
직업 농구선수( 포워드/ 은퇴)
농구코치
학력 서울송정초등학교 (졸업)
용산중학교 (졸업)
용산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경영학 / 학사)
프로 입단 1994년 현대전자 농구단 입단
현역시절 등번호 15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현대전자 (1994-1995)
국군체육부대 (1995~1997)
대전 현대 다이냇/걸리버스 (1997~2000)
안양 SBS 스타즈 (2000~2002)
창원 LG 세이커스 (2002~2004)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4~2005)
서울 SK 나이츠 (2005~2006.2)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6.2~2008)
코치 울산 모비스-현대모비스 피버스 (2008~2018)

1. 소개2. 선수 경력
2.1. 고교-대학 시절2.2. 실업-프로 시절
3. 지도자 경력4. 여담

[clearfix]

1. 소개

KBL에서 뛰었던 대한민국의 농구인. 운동 능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터프함과 단단함, 부드러움을 두루 겸비한 선수였다. 별명은 김무스.

2. 선수 경력

2.1. 고교-대학 시절

용산고 진학 후 양문의 감독 밑에서 배우며 2학년이던 1988년 전국 2관왕(춘계-대통령기), 3학년때인 1989년 전국 4관왕(춘계-대통령기-쌍용기-전국체전)에 오르며 고교농구를 석권한 용산고 전성기의 주전 센터로, 고교 시절의 활약 덕분에 연세대 1학년때 용산고 동창 김승기와 함께 1990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 선수권 대회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1]

연세대학교 진학 후 최희암 감독 아래서 1학년 때부터 팀의 주전으로 출장하여 저학년 때는 주로 2년 선배 정재근과, 4학년 때는 신입생 서장훈과 더블 포스트를 형성했던, 당시 빅맨답지 않게 개인 기술이 좋은 센터 파워 포워드였다. 연세대 시절엔 선배 정재근, 오성식, 이상범, 동기 문경은 및 후배 이상민, 우지원, 김훈 등 초호화 멤버들과 뛰면서 연세대를 실업팀들과 겨루는 농구대잔치에서 상위권에 오르도록 했고, 초특급 신입생 서장훈이 입학한 4학년 때는 이들과 함께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대학팀 사상 최초의 우승을 달성했다.[2]

졸업 후 실업팀 현대전자에 계약금 3억 원을 받고 스카우트되었다.

2.2. 실업-프로 시절

대학 4학년때 출장시간이 줄어든 탓인지 현대전자 입단 첫해에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최병식- 정경호 등에 밀려 벤치에 머물렀다. 하지만 2년차때 상무에 입대한 뒤, 대학시절의 활발한 움직임을 다시 보여주며 조동기와 함께 상무의 골밑을 지켰고, 당시 호화 멤버였던[3] 상무를 1995-96, 1996-97 농구대잔치 결승에 연속으로 올려놓지만, 각각 기아자동차, 연세대를 만나 김유택, 서장훈에게 골밑을 털리며 준우승하고 만다.

상무 제대 후 이상민, 조성원과 함께 원소속팀 대전 현대 다이넷에 합류한 김재훈은, 팀의 막강 외국인 빅맨들( 조니 맥도웰-제이 웹- 재키 존스-로렌조 홀)에 밀려 백업으로 전락하고 만다. 대전 현대에서 총 세 시즌을 뛰며 두 차례 우승 반지를 얻었지만 정작 팀내 비중은 미미했고, 1999-2000 시즌 종료 후 소속팀 대전 현대가 정재근을 얻기 위해 김재훈을 트레이드 카드로 쓰면서 안양 SBS로 이적하게 된다.

파일:안양 SBS 시절의 김재훈 2001-02시즌.jpg

안양 SBS 입단 초반에는 당시 김인건 감독의 신임을 얻으며 김성철과 주전 쌍포로 출전하기도 했으나, 2000-01 시즌 중반부터 팀이 "트리플 포스트"[4]라는 변칙 작전을 사용하면서 다시 식스맨으로 밀렸다. 하지만 이시절 3점슛을 완전히 장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5] 빅맨에서 3번으로의 포지션 변경에 완전히 성공했고, 두 시즌 동안 안양 SBS의 키 식스맨으로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며 맹활약, 유력한 식스맨상 후보로 꼽히기도 했으나, 2000-01 시즌에는 우승팀 멤버 강혁( 서울 삼성)에게, 2001-02 시즌에는 "토털 농구" 돌풍의 주역 정재근(전주 KCC)에 밀렸다.

안양 SBS에서의 두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김재훈은 좀 더 많이 뛰기 위해 연봉 1억 1,500만원에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지만, 여기서도 부동의 주전 김영만에 밀린데다 키 식스맨 자리를 두고 신예 송영진과 경쟁을 펼치면서 오히려 출전 시간이 더 줄어들었고, 결국 2004-05 시즌 중반 인천 전자랜드와 2:2 트레이드(김재훈, 정진영 김훈, 김동언)로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했다가 여기서도 기회를 잡지 못하고 시즌 종료 후에 다시 서동용과 맞트레이드로 서울 SK로 이적하는 등, 저니맨으로 전락하고 만다. 서울 SK 나이츠에서도 문경은, 전희철, 방성윤 등 호화 멤버들에 밀리며 출장 기회를 잡지못하던 김재훈은 2005-06 시즌 중반 가드 강대협과의 트레이드로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 합류하게 된다.

파일:김재훈 모비스 선수.jpg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서는 주로 식스맨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이 신세는 마치 우지원과 함께 벤치에서 후배들을 독려하게 된다. 우지원과는 다르게 스타 출신이 아닌지 빠르게 적응하게 된다.

양동근- 크리스 윌리엄스 듀오가 뛰던 정규리그 1위팀 울산 모비스에서 당시 만 34세이던 김재훈은 "2쿼터의 사나이"로 자리매김하며 마지막 기회를 잡게 된다. 양동근- 윌리엄스 콤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골밑에 약점이 있던 울산 모비스는 외국인 선수가 1명만 뛰는 2쿼터에 공격이 필요할 땐 김동우를, 센터 수비가 필요할 땐 이창수를, 그리고 내외곽 전천후 수비가 필요할 땐 3.5번인 김재훈을 내세우는 전략으로 나섰고, 김재훈도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출전할 때마다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6-07 시즌부터는 3쿼터에도 외국인 선수 1명 출전으로 제한되면서 김재훈은 출장 시간이 좀더 늘어났고, 특히 이 시즌 챔프전에서는 상대팀 부산 KTF의 장신 포워드 송영진을 밀착마크하며[6]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 모비스는 KTF를 7차전 접전 끝에 꺾고 우승했는데, 부산 기아 시절 이후 10년만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07-08 시즌 한 시즌을 더 뛴 김재훈은 2008년 팀의 코치 제안을 받으면서 선수에서 은퇴한다.

외국인 선수가 없었다면 기회는 좀 더 받지 않았을까 싶은 선수였다. 돌충희 신선우 통수만 치지 않았어도 정재헌, 강병수같은 언더사이즈 빅맨으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다만, 우승복은 있어서 반지 3개는 챙기고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파일:유재학 감독 김재훈 수석코치.jpg

2007-08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에서 코치연수를 거쳐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코칭스테프의 일원으로서 2017-18 시즌까지 10년 동안 코치로 활동했다. 임근배 전 수석코치에 이어 수석코치로 승진하면서 모비스 왕조에 공헌을 했다. 코치로서 챔피언결정전 4회 우승(2010, 2013~2015 3연패)과 윌리엄존스컵 우승(2014)을 경험했으며, 제36회 윌리엄존스컵 기간에는 유재학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면서 감독대행 신분으로 팀을 지휘했다.

구단과 팀의 사정상 조동현 전 코치가 부산 kt 소닉붐에서 성적부진으로 물러난 뒤 수석코치로 선임하면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

2019년까지 송파구에서 피자펍을 차렸으나 인도네시아 리그 농구팀으로 갑작스럽게 제안이 와서 피자펍을 그만두고 정리하였지만 감독 라이센스 문제로 무산되어 야인으로 지내고 있고 이후 농구로 다시 복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4. 여담

2003-04 시즌 LG 소속이던 시절, 서울 삼성전에서 1쿼터도 끝나기 전에 5반칙 퇴장을 당한 진기록(…)을 세운 적이 있다.


[1] 하지만 사상 최강이라던 당시 대표팀(G: 김승기, 이상민, 홍사붕, F: 문경은, 조성원, C: 김재훈, 전희철, 서장훈 등)은 조별예선에서 전패를 당하며 광탈했다. [2] 하지만 4학년때 초반까지만해도 서장훈과 함께 주전 4번으로 골밑을 지키던 김재훈은, 정작 농구대잔치 들어 서장훈 싱글 포스트 작전을 사용한 최희암 감독의 용병술 탓에 농구대잔치 내내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때 김재훈 대신 주전으로 나선 선수는 당시 2학년 슈터 김훈이었다. [3] 군입대 동기로 이상민, 문경은, 조성원, 홍사붕, 김승기 등이 있었다. [4] 데니스 에드워즈(192cm)- 표필상(200cm)- 리온 데릭스(205cm)의 빅맨 3명을 동시에 출전시키는 전략. [5] 2000-01 시즌 3점 성공률: 38.1%. 경기당 0.91개 성공. [6] 정규리그에서 평균 13.7점을 기록하던 송영진을 챔프전 평균 9.8점으로 막았다. 특히 챔프전 4차전에서는 송영진을 2점으로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