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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4:10:45

김선홍

{{{#!wiki style="margin:14px" <tablebordercolor=#ed1c24><tablebgcolor=#ed1c24><tablealign=center> 파일:기아 로고(1994-2004) 화이트.svg 기아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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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철호
(1944~1973)
제2대
김상문
(1973~1981)
제3대
민경중
(1981~1990)[1]
제4대
김선홍
(1990~1997)
[1] 아시아자동차 사장 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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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그룹 제4대 회장
김선홍
金善弘|Kim Sun-hong
파일:김선홍전회장.jpg
<colbgcolor=#ed1c24><colcolor=#fff> 출생 1932년 9월 25일 ([age(1932-09-25)]세)
전라북도 익산군 웅포면 송천리
(現 익산시 웅포면 송천리)[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북구 미아동 인근(추정)
본관 광산 김씨 (光山 金氏)[2]
종교 개신교
학력 웅포초등학교 (졸업)
전북공립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 기계공학 / 학사)
경력 기아산업 시흥공장 기술과장
기아산업 공장장
기아산업 기획상무
기아기공 사장
기아산업 사장
한국자동차 공업협회 회장
대한산업안전협회 회장
기아그룹 회장
공업표준협회 회장
국가과학기술 자문위원
평화자동차 고문

1. 개요2. 생애3. 어록4. 여담5. 수상 경력6. 저서7. 관련 문헌

[clearfix]

1. 개요

기아그룹 회장. 국내 재계에서 드문 전문경영인 회장이었다.[3]

2. 생애

1932년 9월 25일,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익산 웅포초등학교, 전북공립중학교[4],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1958년 1월, 기아산업에 공채 1기로 입사해 말단 사원으로 출발해 90년대 국내 재계 8위의 기아그룹 총수로 등극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엔지니어 출신의 경영인이였으며, 1969년 이사, 1973년 상무이사, 한국 최초의 일관공정 시스템을 갖춘 종합자동차 공장인 소하리 공장 건설을 주도했고 1977년 전무이사를 거쳐 기아그룹 입사 32년 만에 이사에 선임된 지 12년 만인 1987년에 회장직으로 취임 되었다. 그의 별명은 한국의 리 아이아코카. 1981년 기아산업 사장에 취임해 1년만에 봉고신화로 적자에 허덕이던 기아를 일으킨 과정이 아이아코카 회장 재직 때의 미국 크라이슬러 회생 과정과 비슷하다고 해 얻은 별명이다. [5][6]

자동차를 근본으로 하여 원가가 더 들더라도 제대로 된 차를 만들도록 지시해 기아그룹 실무진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며, '새로운 경영, 새로운 일터, 새로운 기술'이라는 3대 경영방침을 세웠다. 1987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해제 됨에 따라 이 때다 싶어 프라이드, 캐피탈, 콩코드 등을 출시하여 승용차 라인업을 강화, 그의 노력으로 1988년 자동차 생산 1백만대를 돌파하였고, 1992년 한국 최초의 독자 고유 모델 세피아, 이듬해 자사의 두번째 독자 고유 모델이자 최초의 도심형 SUV인 스포티지 출시 및 세계시장 개척, 1995년에는 수출 1백만대, 이듬해에는 자사의 자동차 누적 생산량 500만대 기록 등 기아그룹을 재계 8위로 성장 시켰으나, 국제 경쟁의 격화,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한 경기침체, 무리한 사업 확장, 계열사의 부실한 경영 실적, 삼성의 무리한 인수추진과 갑작스런 자금 경색에 따른 일시적 위기 등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1997년 봄부터 위기설에 휩싸이다 결국 1997년 7월 15일 부도유예협약 적용대상이 되었고, 김 회장 및 기아그룹 임직원 측에서 여러 자구책을 마련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법정관리로 넘어가고 김선홍 회장 등 경영진은 완전 퇴진하게 되었고, 기아그룹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선홍 회장은 1998년 6월 기아사태와 관련하여 부실 계열사 지급 보증, 회사 공금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 된 후 2000년 6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으며, 2002년 말 특별사면을 받았다. 2003년 가을, 북한 남포공단의 평화자동차 고문을 맡으면서 업계에 복귀했지만, 얼마 못가 다시 고문직을 그만 두었으며, 오늘 날에는 교회 장로 활동과 독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등 야인이 되었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교수 겸 고등과학원 석좌교수인 김명식씨가 김선홍 전 회장의 아들이며, 2016년 6월 1일, 호암상 시상식에서 과학상 수상을 받게 되었는데 이 날 오랜만에 김 전 회장의 근황이 사진에 실렸다. 유명과학자 아들의 헌사에 눈시울 붉힌 김선홍 전 기아회장

3. 어록

- "바퀴도 핸들도 못 만들던 우리가 세계 5위의 자동차 강국이 된 것을 보니 인생을 걸고, 자동차 국산화만을 보고 달렸던 나의 인생이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다." #
- "기아가 100% 자체 개발로 승용차를 만든다고 하자 일본 기술자들이 ‘기아가 만든 차가 굴러갈 수 있을까요?’라며 비웃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씨름한 지 1년 만에 100% 우리 손으로 세피아를 만들어 냈습니다." #
- "나는 선장이 아니라 황포돛대일 뿐이다. 엔진이 안달린 배는 돛대로 갈 수 밖에 없다. 바람이 불면 황포돛대를 올리는 것이다. 바람을 받아목적지까지 가도록 하는 황포돛대인 것이다." #
- "잠에서 깨어나 무서운 속도로 세계화로 나가는 중국과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 이 양대 국가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은 국민 모두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국가경쟁력 강화에 힘을 합쳐 나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
- "가장 중요한 것은 품질이 국가경쟁력의 바탕이 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Made In Korea' 제품이 해외에서 싸구려 인식을 면치 못하면 채산성을 어떻게 맞추겠습니까? PC업계에서 혼다를 배우자고 하고 토요타가 혼다를 벤치 마킹하려고 합니다. 거대 기업 도요타에 비하면 작은 회사인 혼다에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혼다의 뛰어난 품질입니다. 그리고 기업은 종업원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생산성을 높여나가야 합니다. 아주 저렴한 인건비의 중국제품이 세계로 쏟아져 나오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겨냅니까? 기술과 품질이 중요한 시점에 왔습니다. 경영자는 품질경영에 앞장서야 합니다." #
- "기아는 주인이 없다는데 사실 주인이 많습니다. 종업원 한사람 한사람이 다 주인이니까요." #
- "나는 결코 망한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신명을 바쳐 회사를 지킬 것을 결심했습니다. 토요일에 지급되지 않은 월급은 며칠만 참아주면 지급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자랑스러운 기아인입니다. 또한 자랑스러운 아버지입니다." #
1981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인한 기아산업의 경영위기로 김상문 회장이 김선홍 당시 사장에게 경영권을 넘긴 후 소하리 공장에서 기아산업 임직원들에게 한 말.
- "아무리 불황일지라도 좋은 제품을 내놓으면 성공할 수 있다." #
- "제품을 만들기에 앞서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기에 앞서 자신을 만들라." #

4. 여담

파일:1d0fc51175b94476bab1879b27b3fe77.jpg

5. 수상 경력

6. 저서

7. 관련 문헌



[1] 참조. [2] 40세손 [3] 이는 창업자인 김철호의 장손이자 2대 회장 김상문의 장남인 김석환이 그룹 전체를 경영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그룹 전체를 승계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룹에서 삼천리자전거만 분리시켜서 경영했기 때문이다. [4] 전주고등학교 [5] 기아 브리사 등 승용 라인업을 이미 갖췄던 기아산업은 제5공화국 시절 말도 안되고 어이 없는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인해 기아는 2륜차 사업부인 기아기연(주)를 대림으로 뺏기다시피 매각 당하고 승용 라인업이 통째로 사라져 그룹의 이윤이 한 순간에 없어지는 바람에 존망의 위기에 처했었다. [6] 봉고 코치 역시 망해가는 기아의 상황에 "망하더라도 자동차 하나 더 만들고 망하자"는 작정으로 출시 시켰는데 이것이 잭팟을 터뜨렸다. [7] 실제론 36세손이지만 김우중의 조부 때부터 항렬을 3세대 아래로 낮추면서 39세손 중(中)자 항렬을 썼다. 20세기만 해도 같은 항렬 간 나이차가 지나치게 나면 이런 식으로 항렬자를 낮춰 가문의 평균 항렬과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8] 사실 기아자동차의 최대주주는 14%의 지분을 가진 직원들로 우리사주조합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의 입김이 상당히 큰 회사였다. 심지어 본래 오너 일가였던 김상문 명예회장도 이후 증자에 참여하지 않아 기아그룹 부도 시점에서는 겨우 1.9%의 지분 밖에 없었다. 괜히 기아그룹 노조가 부도 당시에 김선홍 회장을 보호한 것이 아니다. [9] 90년대의 기아차 라인업을 보면 단번에 느낄 수 있는데 프라이드와 후속차종인 아벨라가 병행 생산이 되었었고, 캐피탈과 세피아가 중복되는 등. [10] 김철호 창업주의 아들 [11] 이 외에도 자동차산업합리화 정책을 전후해서 기아산업의 경영난까지 덮치자 아예 김상문 회장이 경영에서 손을 떼고 전문 경영인을 회장으로 선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너 일가는 기아자동차에서 이사로 재직하고 있어, 김선홍 회장이 물러난 후에 다시 경영권을 가져와 차기 회장에 오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