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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경준 金景俊 | Kim Kyung-jun |
|
본명 | Christopher Kim (크리스토퍼 김) |
한국명 | 김경준 (金景俊) |
출생 | 1966년 6월 6일 ([age(1966-06-06)]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코넬 대학교 (
경제학 /
학사)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 경제학 / 석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 경영학 / MBA) |
종교 | 개신교[1] |
가족 |
누나 에리카 김 배우자 이보라[2], 딸 알렉산드리아 김[3] |
약력 |
모건 스탠리 서울 지점 펀드 매니저 살로몬 스미스 바니 펀드 매니저 BBK대표 옵셔널벤처스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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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계 미국인으로, 17대 대선을 뒤흔든 BBK 주가조작 사건의 주범. 이 사건으로 결국 감옥살이까지 하게 됐는데 미국 감옥에서 3년 반, 한국 감옥에서 9년 반으로, 무려 13년이다. 30대 후반에 감옥에 가서 50대가 돼서 나왔으니 40대 전체를 감옥에 있었다.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 'BBK의 배신'이라는 책을 출간했다.2. 유년기 및 학창 시절
1966년 6월 6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1971년 6살 때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다. 김경준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연세대학교를 나오고 어머니는 이화여자대학교를 나온 엘리트들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의 마당이 넓은 단독주택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이민을 갔으며, 당시에는 삼촌도 이미 이민간 상태였다고 한다.[4] 이민 후에는 그의 아버지는 큰 이모가 운영하는 주유소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공장에 다녔다.그의 관심사는 어릴 때부터 미국 사회에 합류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한인 사회에 어울리는 것보다는 현지인들과 운동을 같이 하며 친해지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고등학교에서는 학교 대표 운동선수를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공부 외에 아르바이트, 연애 등 다른 활동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학창시절 한국에 가본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아르바이트는 컴퓨터 강사, 과외, 피자집 등 다양하게 수행했다. 고3때는 캘리포니아 물리대회에 학교대표로 참가해 금메달도 받았다고 한다.
1989년 코넬 대학교로 진학했다.[5] 자기는 놀고 대외활동에 전념하느라 과를 정할 때 당시 비인기학과인 경제학과로 진학했다고 하였다.[6] 그리고 본인 스스로가 매우 강조하여 한인회 학생회장이 아닌[7] 코넬 대학교 자치의회 부회장을 맡았다.[8] 그리고 코넬대학교에 당시 한국학과를 만든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성적은 좋았다고 한다. 이후 시카고 대학교에서 1년 간 공부해 재정학 쪽의 논문으로 경제학 석사를 취득했다.[9]
3. 사회인 시절
석사 졸업 후 자산운용사인 GE Capital에서 2년 간 근무하며 M&A 업무를 맡았다. 이 시기 GE 회장이 잭 웰치였다. 당시 그는 보험사를 인수, 각 부서를 쪼개어 매각하고 핵심 부문 만을 높은 가격에 되파는 방식을 통해 커다란 수익을 올렸다. 이런 방식은 미국에서 처음이었다.펜실베이니아대 MBA (와튼 스쿨)을 졸업했다. 재학 중에는 투자은행 파트타임 일을 했다. 그에 따르면 맥킨지&컴퍼니는 와튼 동기들에게는 200여개의 offer를 주었는데 한국 대학에는 몇 명 안 되는 offer를 주었으니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와튼 졸업 후 경쟁률 300:1을 뚫고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인 모건 스탠리로 입사했다.[10] 본인 말로는 모건 스탠리는 WASP가 주류인 회사이기 때문에 백인 주류사회에 끼게 되어 좋았다고 한다. 그는 Proprietary trading desk 부서의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일했다. 모건 스탠리에 당시 30여명밖에 이런 포지션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일을 무척 잘 했기에 승진이 빨랐고 돈도 많이 벌었다. 거기다 그에 따르면, 당시 모건 스탠리에서는 고객 돈을 굴리는 펀드매니저보다 자기 회사 돈을 굴리는 프롭 트레이딩 트레이더가 훨씬 더 연봉이 높았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고객 돈보다 자기 회사 돈을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투자은행 업계에서 아시아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그는 모건 스탠리 도쿄 지사로 자원해서 갔다. 그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투자은행 CEO들은 아시아, 그 중에서도 일본에서 경력을 쌓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가 보니까 그 당시가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될 즈음이어서 그는 일본은 끝물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자신은 한국계고 한국은 한창 성장중이니까 한국에 가면 잘 되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1997년 살로몬 스미스 바니의 서울 지점으로 이직했다. 이 시기는 한국에 투자 은행이라는 개념이 막 도입되던 시점이다.
그 직후 IMF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한국의 금융 시장이 개방되었다. 그런데 한국에 파생 상품이나 글로벌 금융 시장, 투자 은행 업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교포 출신 IBer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 그리고 그들이 투자 은행에 엄청난 돈을 벌어줬다[11]. 그의 사무실 역시 매우 호화로웠다. 이 회사에 다니면서 직장 동료인 부인을 만났다. 그러나 1999년 2월 허위 실적 문제와 회사 허락 없이 다른 펀드 설립에 관여한 이유로 퇴사당했다.
4. BBK 사건 및 투옥
자세한 내용은 BBK 주가조작 사건 문서 참조.2004년 5월말부터 미국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몇 년 뒤 한국으로 범죄인 인도 형식으로 와서 2017년 3월 28일에 징역 8년·노역 500일(벌금 100억 원을 대체)의 형량을 마치고 출소하였으며, 그 다음날 미국으로 돌아갔다. 옥중에서 'BBK의 배신'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5. BBK의 배신
BBK 주가조작 사건이 한창이고 구속돼서 형기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생활이 베일에 싸여 있었으나 자비를 들여 출판한 'BBK의 배신'이라는 책을 통하여 신상의 일부분이 알려졌다. 이 책은 절반은 BBK얘기BBK라는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그 본인의 사생활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 옥중에서 쓰고 옥중에서 출판사를 설립하여 출간한 BBK의 배신이라는 책으로 나름 사생활의 일부분이 알려졌다. 다만 이 책 자체가 2012년이라는 이명박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시점에 출간되고 김경준 본인도 감옥살이를 하며 지냈기 때문에 알음알음 알려졌을 뿐이다. 게다가 김경준 본인의 얘기를 담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은 책이고 본인이 사기로 수감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불쏘시개 비슷한 취급을 받은 책이었으나 2013년경 MBA 준비생들에게 자기개발서로서 인기가 생겼다. 거기다 2018년 이명박이 국민의 지탄을 받고 전 대통령의 신분으로 검찰에 끌려가게 되자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다만 절반은 김경준 본인의 자서전과 같은 내용이고 절반은 MB에 대한 비판이다. 단순히 분에 못이겨 하는 욕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인간 이명박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꼼수의 달인인 이명박 대통령을 묘사하는 것부터 그의 이미지 메이킹, 2007년 대선 정국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다.
- 이명박 대통령은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경준의 주장은 그러한 이미지가 다소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분명 아침 일찍 약속을 잡고 그러한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인 것은 맞지만[13] 과연 진짜로 그런지는 의문이라고 하였다. 특히 아침 일찍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면서 사업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몇군데 없는데 그런 이유로 집 근처이자 아침 식사가 가능한 강남 리츠 칼튼 호텔에서 자주 볼수 있고 자주 미팅을 가졌지만 막상 오후에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연락을 하면 4~5시간 동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연락이 안된다고 말했다.[14] 김경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흔히 알려져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쇼트 슬리퍼나 부지런한 이미지도 만들어낸 허상일 수 있다.
- 김경준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이명박에게 1억을 30억으로 속이는 방법[15]을 배웠다고 나와있는데 이 방법 또한 김경준 본인은 상상도 하지 못한 MBA, 투자은행에서도 절대 배울 수 없는 정글과도 같은 현실에서만 배울 수 있는 꼼수라고 하였다.
-
2007년 당시 김경준이 체포되어 미국에서 한국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웃는 모습을 보고 양심없는 파렴치한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고 비난한 것에 대한 변명도 하였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죄책감이나 잘못을 못느낀게 아니라 그 당시 유력 대선 주자의 범죄와 관련된 인물이라 강도높은 압박[16]때문에 쉴새없이 시달렸고 바깥 공기를 처음으로 쐬서 그나마 기분이 좀 풀린 시점이 그 때였는데 기자들이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어 마치 그렇게 나온 것이지 자신은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라고 적어놓았다.
2017년 인터뷰에서는 당시 좌석이 아니라 '벙커' (
객실 승무원들이 쉬는 공간)에 10여명의 법무부 직원들과 함께 13시간 동안 갇혀 있었고 비행기에서 내린 뒤 탑승한 밴 역시 난폭운전을 해서 멀미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다 내려서 땅을 밟고 바깥 공기를 마셔서 웃음이 나온 걸 사진이 찍힌 것이라고 한다.
- 김경준은 홍준표 대표나 이혜훈 의원같은 사람들의 얘기도 실었는데, 대체적인 내용은 참여 정부를 겨냥하고 MB의 당선을 돕기 위한 각종 협박과 거짓말에 대해서 실제 실행한 인물들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6. 저서
- BBK의 배신 (비비케이북스, 2012년)
7. 기타
- 그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학창 시절부터 많은 노력을 했다. 점심은 항상 이동하면서 샌드위치로 때웠고, 빨래나 쇼핑에 시간이 많이 걸리면 아까우니까 대기자가 적은 새벽 시간대를 활용했다. 시험 준비 역시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 부분과 수업에서 나오는 모든 내용을 구분하려 했다. 중요한 부분을 파악하고 최대한 짧은 기간 안에 배워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부할 때 강도 높은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데, 집중력은 하루종일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중간 중간 놀면서 공부할 때만 집중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에 따르면 코넬대 교육 역시 전공 지식보다는 특정 분야에 대해 짧은 시간 집중력 있게 공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성을 쌓는 훈련이라는 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한다.
- 그가 1997년 한국에 처음 부임했을 때는 미국, 일본의 투자 시스템이 한국에서 전혀 먹혀들지 않아 손실을 많이 봤다. 그는 투자 시스템을 현지화해야 한다며 3개월 동안 밤 새워가며 개조를 했고, 그 다음에는 이익이 많이 났다. 1997년에는 살로몬 스미스바니에 70억 원의 순이익을 안겨주고 연봉 10억 원을 받았다. 그리고 1998년에는 살로몬스미스바니증권의 파생상품팀장으로 근무하면서 펀드 100여 억 원을 갖고 3~5배의 레버리지로 현물-선물 차익거래를 해서 많은 수익을 남겼다. 이 수익률은 살로몬 스미스바니 전세계 지점 중 최고였다[17] 그는 1998년 4월부터 1999년 1월까지 9개월 동안 140억 원이 넘는 순 익을 거뒀고 이자, 세금 등을 제외해도 109억 원이 남으므로 137%의 수익률을 냈다는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차익거래와는 별도로 외국 투자자들의 한국 내 증권투자를 대행해주고 100억 원의 수수료를 받았다. 이런 그의 주장에 대해 살로몬 스미스바니는 '허위 실적을 유포했고 회사 허락 없이 다른 펀드 설립에 관여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1999년 2월 그에게 정직 6개월의 처벌을 했는데 이는 사실상의 해직을 의미한다. 연봉 계약 자체는 연봉 8천만 원에 순 실현 이익의 20%의 성과급이다. 이에 대해 회사 측 입장은 회사의 이익 109억 원은 김경준의 순 실현 이익이 아니라 파생 상품 팀 전체의 수익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파생 상품팀 직원들의 연봉과 김경준 본인의 연봉을 제외하고 20%의 성과급을 계산하면 12억 원 정도를 주어야 한다. 반면 김경준 입장은 109억 원의 20%인 21억 8천만 원을 요구하면서 소송을 냈다[18]
-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2019년에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 후보로 지명되자 자기 페이스북에다 반가운 뉴스라면서 BBK 사건을 수사한 김기동 검사 등을 거론하며 적폐 검사들 꺼지라는 드립을 쳤는데( #), 아무래도 윤석열이 과거 BBK 특검 파견검사였고, 당시 수사 종료 후 브리핑에서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전혀 모르는 듯하다.
[1]
본인 스스로 밝히길 그냥 다녔다고 한다. 이민 사회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라 어쩔 수 없었던 듯.
[2]
이두호 전 보건사회부 차관의 딸.
[3]
한국명 김혜진.
[4]
2007년 월간조선.
[5]
여러
아이비 플러스 대학교와 함께
UC 버클리까지 합격했다고 한다. 단,
하버드 대학교는 떨어졌다.
[6]
미국 문과(?)에서 경제학과는 한국과 달리 인기 없는 학과였던 적도 있다. 지금은 한국이랑 똑같다.
[7]
대부분 미국에서 학생회장을 했다는 학생들이 한인 회장들이라 자신은 이 점을 꼭 강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8]
회장 직위는 대학교 학생이 아닌 직원밖에 할수 없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한국의 학생회장 개념과 같다고 설명하였다. 명목상 회장(직원)이 있을 뿐 실제 업무는 부회장(학생 대표)이 일을 다하는 개념이니 한국식 개념의 총학생회장으로 간주하더라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자리를 동양인이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9]
시카고 대는 경제 학계에서 최고 수준이다.
[10]
1위인
골드만삭스에 가고 싶었으나 못 갔다고 한다.
[11]
그에 따르면 이런 인기는 2008년 금융위기 직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12]
이미지 메이킹을 비롯한 다양한 경제계 꼼수의 근원은 거의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나온다.
[13]
본인은 그렇게 일찍 만나는 것이 매우 싫다고 하였다.
[14]
아마도 김경준 본인은 이 시간에 낮잠을 자는 듯 하다고 여겼다.
[15]
은행 지점장과 미리 짜고, 하루 동안 1억 원 입금과 출금을 30번 반복한다. 은행 지점은 입금 처리만 먼저 한 뒤, 출금 처리는 나중에 천천히 한다. 은행 지점이 발급한 30억 원 입금 확인서는 법원에 제출한다. 김경준에 따르면, "
이명박이
현대그룹 재직 당시 계열사를 새로 만들 때 사용한 수법"이라고 한다.
[16]
조사가 아니라 압박이었다. 혼자죽으라는 압박.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압박
[17]
당시 홍콩 35%, 일본 20%, 뉴욕과 런던은 마이너스
[18]
99년 신문기사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