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6년 2월 24일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신기마을 | |
사망 | 1984년 5월 17일 (향년 58세) |
광주광역시 | |
본관 | 행주 기씨[1] |
창씨명 | 도쿠야마 히데요(德山英世) |
호 | 창허(創虛)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38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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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기환도는 그의 둘째 형이다.2. 생애
1926년 2월 24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신기마을에서 아버지 월파(月波) 기우양(奇宇洋, 1902.3.4. ~ 1976.3.21.)[2]과 어머니 하동 정씨 정덕순(鄭德順, 1898.2.9. ~ 1985.12.6.)[3] 사이에서 5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기우양은 1925년 8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된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했는데, 당시 제3종 조선어 및 한문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1925년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에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장성군 월평보통학교의 촉탁교원으로 근무했고, 8.15 광복 후 1952년에는 월평국민학교 교장을 역임했다.그는 광주서중학교 재학중이던 1940년 3월 선배 유몽룡(劉夢龍)의 소개로 교내 항일학생결사 무등회(無等會)에 가입하였다. 무등회는 1938년에 조직되었던 서중독서회(西中讀書會)가 확대 개편하면서 개칭된 것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을 목적한 결사였다. 그는 무등회의 주요 회원으로서 동지포섭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42년 10월 병으로 학교를 휴학한 그는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예비학교, 신주쿠고등예비학교에 다녔지만 곧 귀국하여 학교 외부에서 무등회와 관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무렵 교내에서는 박화진·배종국 등 5학년생이 중심이 되어 교풍쇄신운동을 표방하면서 일제 식민통치에 대항하였는데, 그러한 활동이 일경에 탐지되어 주동학생들이 검속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무등회를 중심한 광주서중의 학생들은 이를 계기로 학병지원 반대· 창씨개명 반대·일어 상용 반대·징병제도 반대 등을 내걸고 1943년 5월 21일에 일제히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년 여 간 미결수 신분으로 수감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1944년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상해 혐의로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으로 출옥했다.
이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4년 5월 17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기태룡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 7월 8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