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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에 근대식 무기와 기기를 만들기 위해 설치한 관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장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2. 상세
1883년(고종 20년) 5월에 설립했다. # 그 전에는 통리기무아문 산하에 군물사(軍物司)와 기계사(機械司)란 관청에서 무기 및 관련 기계 등을 만들어냈다.1881년(고종 18년) 9월에 조선 정부에서는 김윤식을 대표로 한 영선사를 청나라 톈진에 파견했다. 영선사는 신식 무기를 배우고 수입 루트를 트기 위한 목적을 띈 일종의 유학 사절이었다. 이들은 임무대로 톈진에 있는 기계 및 무기 제작소인 톈진기기국을 시찰하면서, 탄약, 화약 등 신식 무기 제조법과 화학, 기계학, 전기, 외국어 등 다양한 신문물을 배웠다.
한편, 영선사 일행이 청나라에 가있던 1882년(고종 19년) 5월에, 당시 통상사당상이었던 김홍집은, 기기 공장을 세우기 위한 차관 및 기계 구입 조건 등을 협상하려 청나라의 마건충과 접촉했다. 그리고 톈진 기기국에서 관련 내용을 접수했지만, 얼마 뒤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계획이 미뤄졌다.
임오군란이 어느 정도 진정된 그 해 10월에 조선 측에서는 근대식 과학 기계와 서적들을 각각 62종과 33종 씩 청나라에서 가져왔다. 또한 그해 말에 영선사 일행이 귀국하면서 청나라 기술자들도 같이 조선으로 같이 데려왔고, 이들을 통해 톈진기기국 같은 신식 무기를 전문으로 만드는 공장을 세우려 했다.
이듬해인 1883년(고종 20년) 4월에 고종은 기기 생산 공장과 이를 다룰 관서를 설치하기로 하고, 군국아문에 이와 관련한 시행 규칙 등을 마련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훈련도감 소속의 재정 관서인 양향청에 기기 관서를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
기기 관서가 들어설 자리는 삼청동에 있던 화약도감 소속 북창 터였다. 마침내 그 해 5월 23일에 기기 관서를 정식으로 세웠고, 이름을 '기기국(機器局)'이라 했다. 단, 업무 시작일은 약 일주일 뒤인 6월 2일이었다. 총판에는 박정양과 김윤식을, 방판에는 김명균을 임명했다. 다음 해인 1884년(고종 21년)에는 기존의 전통적 무기를 제작했던 군기시(軍器寺)를 합병하여 명실상부한 조선의 대표 병기 양성소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기기국 산하 공장인 기기창(機器廠)은 그 해 8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887년(고종 24년) 10월에 완공했다. # 기기창에서는 주로 증기기관을 이용해 병기들을 많이 만들었다. 초반에는 구리로 만든 퍼커션 캡과 그것을 사용하는 머스킷을 주로 생산했고, 1886년 부터는 화약까지 만들었으며, 1889년 이후로는 강선을 파는 기계까지 도입하여 소총을 생산하게 되었다. 운동기기, 조총, 내찬혈기, 조포기, 세포기 등도 청나라에서 구입하여 생산했지만, 정확하게 제작한 무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과거 일부 서적에서 이를 두고 별 쓸모 없다고 폄하를 했었는데, 실제론 소총과 회선포(개틀링건)에 쓸 탄약은 물론 암스트롱 포의 탄약과 최소 2문 이상의 복제품을 자체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에서 도입하지 않은 총기의 탄약을 종종 대량 구매했던 것으로 보아 정황상 다른 종류의 탄약을 개조하거나 재생 탄환을 만드는 등의 작업 또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정부에서 공식적인 정부 재정 수입원인 공조를 통해 자금을 대고, 금/은점의 운영특권과 휘하 야장등을 통한 도구의 생산으로 세도정치의 재정을 지탱하던 훈련도감의 수익원을 분리해서 지어진 공장이라 충분한 자금을 바탕으로 초창기에는 탄약 생산을 충실히 해내며 동시에 일부 근대 병기의 생산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이나, 1889년(고종 26년)에 탕춘영을 비롯한 중앙군의 주요 탄약고가 폭발 #하는 사고가 일어남에 따라 1890년대 초에는 이런 손실로 인한 재정난과 경영난에 허덕여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탄약 생산에 치우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894년(고종 31년)에 청일전쟁[1]과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1895년(고종 32년) 3월에 '포공국(砲工局)'이란 이름으로 재설치했고 군부 산하로 흡수시켰다. 러일전쟁 이후인 1905년( 광무 9년) 3월에는 '군기창(軍器廠)'으로 다시 개칭했다가 # 1907년( 융희 원년) 8월에 대한제국군이 일제에게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사라졌다.
3. 건물
3.1. 번사창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50호 | ← | 51호 | → | 54호[2] |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 기기국 번사창 | 창빈 안씨 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1호 | |
기기국 번사창 機器局 飜沙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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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118 (삼청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관아 |
수량 / 면적 | 건물 1棟, 토지 231.2㎡ |
지정연도 | 1982년 12월 17일 |
시대 | 1884년 ( 고종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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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 번사창[3] |
[clearfix]
3.1.1. 개요
기기국의 건물 중 하나이다. '번사(飜沙)' 뜻은 ' 흙(沙)으로 제작한 거푸집에 금속을 녹인 액체를 부어(飜) 만든다'이다. 현존하는 근대식 벽돌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1982년 12월 17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받았다.3.1.2. 역사
기기국 창립 1년 뒤인 1884년(고종 21년)에 세웠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세균실험실로 사용했고,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에는 중앙방역연구소로 썼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립사회복지연구원으로 기능했다. 그러다 1970년부터 한국은행에서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현재 번사창 건물은 한국금융연수원 경내에 있다.3.1.3. 구조
- 전반적으로 한국식을 바탕으로 하되, 중국과 서양의 양식을 섞은 건물이다. 연면적 217.58㎡(약 66평)에, 길이 33m, 폭 8.5m로, 1층이다. 장대석과 사괴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회색 벽돌로 벽체를 쌓았다. 벽체 벽돌의 크기는 가로 25cm, 세로 5cm로, 현재 건축 자재로 사용하는 벽돌과는 크기가 다르다.[4]
- 출입문은 총 3개로, 정면에 2개 있고 우측면에 1개 있다. 정면 가운데에 있는 문이 정문이고, 다른 정면의 문은 정면 좌측 끝에 있다. 형태는 아치인데, 정면 가운데 문의 아치는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나머지 문들의 아치는 붉은 벽돌 띠를 두른 회색 벽돌로 조성했다. 창은 정면에 5개, 우측면과 좌측면에 각각 2개 씩 있다. 창의 모양은 수평아치가 대부분이나 정면 우측 2개와 우측면 2개는 세그멘탈 아치이다. 문짝은 나무문이며 출입문은 붉은 색, 창문은 청녹색이다. 창에는 창살을 설치했다.
- 지붕 형태는 맞배지붕이고 재질은 한국식 기와이다. 지붕 위에는 삼각형 형태의 이중 지붕과 환기구를 설치했는데, 이는 무기를 만들 때 생기는 열기와 오염 물질들을 배출하기 위해서이다. 좌측면 박공 중앙에는 원형으로 생긴 작은 환풍구가 있다.
<colbgcolor=#C00D45> 번사창 내부[5] |
3.1.4. 여담
<colbgcolor=#C00D45> 번사창 상량문[6] |
- 2015년 2월에 한국금융연수원에서 번사창 옆에 합숙소를 짓기 위해 매장 문화재 조사를 하다가 기기국의 옛 건물 터를 발견했다. 건물의 길이(27.8m)와 폭(10.1m)이 번사창과 거의 비슷했고 기반 축조 방식 역시 번사창과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서울특별시에서는 건물 터를 포함한 관련 유적을 같은 해 5월 29일에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고시했다. #
[1]
이때 청군에게 약탈당했다. 앞선 사고에 더한 약탈로 인해 일본군의 경복궁 장악 과정에서의 무장 해제 및 파기와 함께 을미사변 당시 탄약 부족으로 수비대가 10여 발의 탄약만 가지고 교전해야 했던 상황을 빚어냈다.
[2]
52호 승가사승가굴관음보살상은 1989년 4월 10일에 해제되어
보물 1000호로 재지정받았고, 53호
중명전은 2007년 2월 7일에 해제되어
사적 124호
덕수궁과 통합되었다.
[3]
첫 번째 사진 출처 - 위키백과.
두 번째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4] 사실 대부분 근대나 전통 건축에 사용한 대부분 벽돌들 크기가 현재와 다르기 때문에, 보수나 복원 공사할 때 수급이 힘들다고 한다. [5]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6]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4] 사실 대부분 근대나 전통 건축에 사용한 대부분 벽돌들 크기가 현재와 다르기 때문에, 보수나 복원 공사할 때 수급이 힘들다고 한다. [5]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6]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