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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황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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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太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행적3. 창작물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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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후한 말의 인물.

후한서에는 곽태(郭太)[1], 자치통감에는 곽대(郭大)로 기록되어 있다.

2. 행적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지만 1년도 안돼서 진압되었는데, 황건적 당시의 활동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황건적의 난 이후에는 그 잔당으로 남아 188년에 서하군의 백파곡에서 일어나 태원 하동 약탈했다.

189년에는 영제가 붕어한 것으로 인해 천하가 어지러운 것을 이용한 흉노 선우 어부라가 합세해서 힘을 합쳐 인근 군현을 침입했다고 하며, 곽태가 백파곡에서 봉기한 것으로 인해 백파적이라 불렸으며, 태원과 하동이 약탈된 것으로 인해 백성들이 난민이 되어 삼보 지방으로 흘러들어갔고 동탁 우보를 보내서 백파적을 공격했지만 물리치지 못했다.

자치통감》의 곽대라는 이름이 원소에게 격파당한 흑산적 두령 중 하나인 곽대현과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인물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지만, 백파적과 흑산적은 활동영역이 별로 겹치진 않는다.

3. 창작물에서의 등장

토탈 워: 삼국에서 190년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 하의 휘하 초기 장수로 나오며, 162년생으로 설정되어 186년부터 임관한 것으로 되어있고, 190년 시점에서 나이는 28세, 유형은 학자, 칭호는 옥 조각가, 특성은 우아함, 불충함, 위협적, 능력치는 최대 200을 기준으로 전문성 79, 결의 57, 책략 40, 본능 53, 권위 57.

소설 삼국지 여포전에서는 강거와 연합해 여포군을 공격했고 일자진을 펼치는 여포군을 우습게 여겼으며, 토산을 세우려는 여포군을 공격했다가 성렴 휘하의 병사들에게 패해 참수되었다.

삼국지 가후전에서는 백파적의 명목상 총대장으로 우보의 군사와 싸우는데, 서황이 패한 소식을 듣고 자신을 지원한 원씨의 지원금 절반을 뿜빠이 조건으로 독단적으로 흉노를 끌어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흉노와 백파적 각 두령에게 지원금을 나눠줄 상황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서황이 이를 눈치채자 비밀로 해달라고 한다.

흉노를 끌어들여 여러 차례 승리하고 원씨 가문이 낙양에서 몰살당한 것을 듣고 우보의 군사와 화의로 하기로 하며, 흉노가 가후의 지시를 받은 군사들의 공격으로 패하자 호적아와 함께 화의를 위해 금을 받아가기로 한다. 우보와 화의를 하러 갔지만 가후의 군사가 흉노를 격파한 것으로 인해 우보가 약속했던 금보다 적게 주는 것을 보고 반발해 싸우겠다고 하자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고 여긴 호적아에게 그 자리에서 끔살당한다.


[1] 범엽의 후한서에는 그의 아버지 이름이 범태(范泰)였기에 곽태(郭太)로 기록되어 있어 후한 말의 유학자 곽태가 졸지에 황건적 곽태랑 한문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 되어버렸다. 고인능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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