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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고봉조 (高奉朝) |
출생 | 1920년 9월 11일 |
전라남도
제주군 저의면 성산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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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3년 10월 8일 (향년 43세) |
제주도
제주군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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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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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고봉조는 1920년 9월 11일 전라남도 제주군 저의면 성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0년 3월 메이지대학 전문부 특과 야간부에 재학했고 낮에는 김봉각(金奉珏)의 매형이 경영하는 금성제작소(金城製作所)에서 김병목(金丙穆)과 함께 근무했다. 이때 그는 “조선청년의 갈 길은 오직 하나, 민족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는 길뿐이다”는 김봉각의 주장에 공감하고 함께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담론한 끝에, 강금종, 한만숙(韓萬淑) 등의 동지를 규합, 같은 해 5월 흥아연구회(興亞硏究會)를 조직했다. 이어 일본 국내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직을 더욱 확대 강화하기 위해 흥아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인비밀결사인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를 결성, 행동방침을 정하고 항일민족운동을 강화했다.그러나 1941년 2월 25일 여러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2년 11월 18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고 1963년 10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고봉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