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대 그리스의 성지였던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제사. 오늘날에는 고대 그리스의 풍습에 따라 이 제사에 포함된 운동 경기들이 유명하며, 이 경기들은 근대 올림픽의 상징적 기원이 되었다.2. 특징
범그리스 제전 경기는 당시에도 무척 많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제일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대회가 올림피아 제전 경기였다.[1] 정확하게 시작된 시기는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혼합되어 있어서 정확하게 유추하기는 힘들다. 일설에는 기원전 9세기부터 열렸다고 하며, 헤라클레스가 12가지 임무를 완수한 후 기원전 776년에 도시국가 엘리스에서 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3]. 지금의 올림픽과 같이 4년에 한 번, 5일간 열렸다. 이 덕택에 역사 기록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왜 홍길동이 레슬링 3패를 했잖아~ 그 2번째 올림픽에서 2년이 지났을 때~" 하는 식으로 사람들이 기억을 서로서로 확인하기도 좋았고, 올림픽 승리자들의 목록은 잘 기록되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이 '이때는 철수 선수가 전차경주 우승했던 해인데...' 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기도 좋았다.원래 올림픽은 그리스 지방에서 열리던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제사의 하나였으며, 오늘날 '올림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연상하는 운동 경기는 이 제사에 포함된 행사 중 하나였다.[4] 여기에 참여할 수 있는 선수는 오로지 그리스 출신의 자유민 남자뿐이었다.[5] 처음에는 종교성이 강한 대회였으나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수많은 종목이 추가되었고, 예술인들이 제전을 위해 올림피아에 몰려들었다. 따라서 고대의 올림픽은 종교, 예술, 군사 훈련을 집대성한 헬레니즘 문화의 결정체였다. 이후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로마 제국 시대에도 계속 행해졌지만[6] 로마인들이 올림피아 제전에서 그리스적 전통을 거부하면서 종교성이 점차 퇴색되고 오락과 유희성이 강해지기 시작했으며 네로 황제가 경기를 조작해서 휩쓸기도 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지정되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 이교도의 제전'이라는 이유로 393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근 12세기(정확히는 1169년) 만이었다. 물론 그때 단번에 사라졌던 것은 아니고, 오랫동안 부활의 움직임이 있기는 했지만 중세에 접어들면서 결국 잊혀 아예 역사의 무대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7]
3. 경기 행위
사실 평화의 제전이라는 이명답지 않게 고대 그리스 시대는 물론, 로마 제국 시대의 올림픽 또한 꽤나 막장이었다. 선수는 물론 심지어 고위 귀족들마저도 뇌물과 반칙을 서슴지 않았고, 경기 자체가 장사와 선전판, 그리고 토토충들의 도박판이 되었다.고대 올림픽의 행위는 제우스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었고, 목숨을 담보로 한 운명과의 싸움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를 아곤(ἀγών/Agon)이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인은 승자는 자신의 공동체에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패자는 죽음 혹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를 겪어야만 했다. 레슬링이나 권투 같은 종목에서, 패자는 거의 대부분 죽었다고 봐도 된다. 물론 경기 중간에 손가락을 올려 항복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전 사회적으로 등신 취급을 당했기에 죽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아예 자신이 없는 경기는 기권했다. 그런데 출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경기에 그냥 불참해버려도 문제였다. 어떤 선수는 복싱 경기에서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팡크라티온 경기에 불참해버렸는데 상대 선수의 자존심을 짓밟았다는 이유로 벌금형과 채찍형에 처해졌다.
이 당시의 경기는 지금 보면 참으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격투 경기인 팡크라티온에서 금지하는 것은 눈을 후비는 것과 입으로 깨무는 것, 손톱으로 할퀴는 것, 이 세 개가 전부였고, 이마저도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경기는 옷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몇 시간이고 누군가 죽거나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권투의 경우, 올림픽 초기에는 히멘테스라는 가죽 줄을 주먹에 두른 채로 싸웠지만 로마 제국 시대로 접어들자 날이 선 쇠를 가죽 줄에 감은, 그 악명 높은 카에스투스를 두르고 싸우게 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눈두덩이가 부어 올라 있다거나 턱에 홈이 패여 있다거나 귀가 찌그러진 것은 복싱 선수의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에서 승리한 자는 전 공동체의 영광이 되었고 다른 큰 폴리스[8]에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엄청난 출세를 할 수 있었기에 경쟁은 치열했다.
당시의 경기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경기를 하다가 조금 복잡해져서 서로 한 번씩 타격을 가하기로 판정이 났다. 그래서 한 선수가 상대편 선수의 얼굴을 세게 쳤는데, 상대편 선수는 이 선수의 배를 손가락으로 찔러 내장을 끊고 뜯어버렸다. 하지만 심판은 "다섯 손가락을 다 썼으니 5번의 타격을 가한 것"이라고 판정하고 내장이 뜯긴 선수를 승자로 판정했다. 어차피 바로 죽었지만.
또다른 예도 있다. 한 선수가 상대방에게 목 조르기를 당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혼신의 힘을 짜내 상대방의 다리를 관절기로 부러뜨렸다고 한다. 그걸 당한 상대방은 고통으로 항복했지만 승자는 질식사 했다고 한다.
멀리 뛰기 종목이 있었는데 이건 양손에 5kg 정도의 쇳덩이(할테레스)를 들고 추진력을 더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때의 기록이 현재의 세계 기록보다도 약 50cm 정도 더 멀다고 한다.
'스타디온'이라는 180m~240m[9]의 거리를 뛰는 경기가 뒷날 ' 스타디움'의 유래가 된다. 24스타디온을 뛰는 경기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스타디온'을 비롯한 달리기가 가장 인기가 많은 메인 이벤트였다. 보통 '스타디온'의 우승자가 가장 큰 찬사와 영광을 얻고, 그해의 올림픽을 칭할 때 그의 이름이 수식어로 붙는다. 예를 들어 '김아무개'가 우승자라면, 그 올림픽 경기는 '김아무개가 우승했던 올림픽'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에는 메달 같은 것이 없었으며, 승자에겐 월계관과, 본인이 승리한 경기가 그려진 테라코타 항아리에 올리브유를 가득 담아 주었다.
전술하였듯, 선수로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젊은 그리스인 남성뿐이었고 외국인과 노예는 참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이 그리스인 혈통이라는 것을 심판들에게 인정받은 후에야 경기에 참가할 수 있었다.
여성의 참석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참석이 발각된 경우 절벽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기혼 여성은 참가도 관전도 금지였으나, 처녀의 경우는 결혼 전에 이렇게라도 남성들의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관전은 가능했다. 그리고 남성 경기가 없는 날에는 헤라 여신을 위한 스파르타 여성들의 특별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대신 여성 경기는 옷을 입고 진행되었다. 그러다 한 선수의 어머니인 칼리파테이아(Kallipateira)라는 여성이 헐렁한 옷으로 코치인 양 참석했다 잡힌 이후로[10] 관중도 알몸으로 보게 하였다. 이에 대해 다른 학설이 있는데, 권투 경기에 참전한 스파르타 여성이 남자 선수들을 충공깽한 실력으로 발라버려서 이후에 선수도 관중도 알몸으로 경기를 참가하고 관전하게 했다고 한다.
여성이 유일하게 참가할 수 있었던 경기는 전차 경주로, 전차의 주인이면 참가할 수 있었다. 경기장에 들어올 수는 없었고 전차는 마부가 몰았지만, 그래도 승리하면 월계관은 받았다.[11] 다만 이런 여성 경기 규제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느슨해져서 기원전 4세기경부터 헤라 여신을 위한 여성들만의 제전 경기가 열렸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고대 올림픽이 평화의 제전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까지 도시국가로 뿔뿔이 흩어져 전쟁을 밥 먹듯이 하고 살았던 그리스가 같은 민족, 같은 언어, 같은 종교 이념, 즉, 공통의 가치를 가지고 한 장소에 모여 일시적인 화합을 도모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고대 올림픽의 가치에 주목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특히 제전 시작 3개월 전부터 올림피아로 몰려드는 여행객과 주민의 보호를 위해 그리스 전역에 휴전령을 선포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제전 경기 전은 에케케이리아(ekekheiria)라고 해서 신의 보호를 받는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전쟁 금지, 타인의 재물에 손대는 것까지 엄격히 금지했다. 물론 휴전령을 무시하고 전쟁을 벌였다가 올림피아 제전에서 임시 제명되었던 애들이 있었는데, 바로 성깔이 험악한 스파르타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 때문에 근대 올림픽은 태생적으로 평화 지향적이며, 기계적 중립을 중시하는 편이다. 다만 고대 올림피아 제전의 의의는 어디까지나 올림피아 성소에서 봉헌하는 제사였다는 데 있고, 휴전은 종교적 동기를 가진 '성스러운 휴전(ekekheiria)'이었다. 즉 운동 경기가 휴전을 부른 게 아니라 제사가 휴전을 부른 것이기에 태생적으로 근대 올림픽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4. 경기 일정
4.1. 제1일
4.2. 제2일
4.3. 제3일
- 제우스 신을 기리는 제사
- 달리기
4.4. 제4일
4.5. 제5일
- 시상식
- 제우스 신 감사제
- 승자의 연회
5. 사건 사고
-
페레그리노스 프로테우스 분신자살 사건
견유학파 철학자 페레그리노스 프로테우스는 부유한 박애주의자 헤로데스 아티쿠스를 비방해 악명을 얻자 161년에 다음 올림픽에서 분신자살하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서기 165년 올림피아에서 동쪽으로 3.7km(20스타디아) 떨어진 성화에 몸을 던져 스스로 불타 죽었다. 남이 말려줄 거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6. 대중매체에서
- 애니메이션 시간탐험대 23화 <불타올라라! 불꽃의 격투기 마라톤!![13]>에서 올림피아 제전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이 회차에서는 3일차 경기인 달리기만 등장한다.
7. 관련 문서
[1]
올림피아 제전과 비견할 만한 대회가
델포이의 퓌티아 제전, 네메아의 네메아 제전,
코린토스의 이스트미아 제전이 있었다.
[2]
이쪽을 따른다면 올림픽의 기원은
헤라클레스가 제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열었다는 대회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올림피아 제전의 상징하면 헤라클레스였지만 훗날 제우스에게 자리를 내줬다고 한다.
[3]
헤라클레스가 신이 되는 이야기가 이때 창작되었다고 한다. 헤라클레스의 인기가 굉장했기에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물러나게 할수는 없었을테니.
[4]
고대 사회에서 이런 기량 겨루기를 신에게 바치는 행위는 비교적 흔한 행위였다.
일본의
스모도 신들에게 힘을 바치는 제전 경기에서 출발했다.
[5]
나중에
헤라 여신에게 바치는 여성 경기도 만들어져서 남성 경기가 없을 때 별도로 열렸다.
[6]
로마인들은 비록 그리스를 힘으로 제압했지만 그 후에도 그리스를 문화적 선구자로 인정했고,
그리스인의 문화를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존중했다. 고대 그리스 시절의
강소국
아테네,
스파르타는 로마 제국에서도 정치적 권위는 사라졌지만 유명 관광지였고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로마인의 사상에도 그리스의 영향이 지대하게 녹아들었다.
[7]
대한민국의 1980년대
국정 영어 교과서에는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잃어서 올림픽이 폐지되었다고 서술하였으나, 로마 제국 치하에서도 무려 500여 년이 넘는 오랜 기간 계속 개최했기 때문에 명백한
고증오류다.
[8]
예를 들면
아테네 같은 곳이다.
[9]
정확한 수치는 불명이다.
[10]
다행히 그날 아들이 복싱 대회에서 우승한데다 그녀의 아버지, 형제, 남동생이 전부 우승 경력이 있는 선수 명가 집안이라서 살아남았다.
[11]
최초의 사례는 기원전 390년대 스파르타의 공주 키니스카. 키니스카는 에우리폰티다이 왕가의 아르키다모스 2세(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스파르타의 늙은 왕)의 딸이었으며, 일찍부터 말을 훈련시키는 데 관심이 많았고 후일 전차 경주에 직접 훈련시킨 말들과 스카우트한 남자 마부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출전시켜서 승리를 거두었다.
[12]
선서도 경기로 간주되었다.
[13]
국내 번역 제목으로는 고대 올림픽.
[14]
올림피아 제전으로 고대 그리스 각 도시국가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