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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0:45:29

리일경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20년 3월 27일, 함경남도 원산부 현면 용두도의 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8년에 소학교에 진학했으나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3학년까지만 다니고 그만두었다. 이후 1년간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숙모의 도움으로 학업을 재개하여 1934년에 6학년을 마쳤다. 이후 통조림 공장 노동자로 취직하여 1936년 5월까지 일했다. 이후 조선등유회사로 이직해서 1939년 7월까지 일했으나 병에 걸려서 그만두었다. 과거에는 1911년 출생으로 김일성과 소학교 동창생이며,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다는 황당한 정보가 돌아다녔으나, 소련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낭설로 확인되었다.

이후 고향 용두도로 돌아가 6개월 동안 교사로 일하다가 원산으로 가서 음식점 점원으로 일했으나 이도 곧 그만두고 용두도에서 막노동자로 일했다. 1941년 1월에 교사시험에 합격하여 명성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1945년 8월까지 일했다. 해방 이후 명성학교 교장이 되어 1945년 10월까지 재임하다가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월까지 원산시 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부임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공산당에 입당, 1946년 1월, 덕원군 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6년 5월 조선공산당 원산시 당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8월, 원산시 당위원회 총무과장에 임명, 1946년 9월, 원산시 당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9월, 북조선로동당 황해도 당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9월 15일부터 1950년 7월 1일까지 조선로동당 당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러시아어 실력도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이에 소련 유학 후보생으로 추천되어 모스크바 고듭당학교로 유학, 1953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안남도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2급을 받았다.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박영빈이 숙청되자 후임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선전선동부장에 유임되었다. 1957년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9월 7일, 강량욱, 강영창, 김두삼, 김회일, 리기영, 리송운, 리천호, 리희준, 백남운, 정두환, 진반수, 최철환, 한설야와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교육문화상 조동이 결정됨에 따라 선전선동부장 자리를 김도만에게 내어주고 1958년 9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이동한 한설야의 뒤를 이어 교육문화상에 임명되었다. 교육문화상으로 재임하면서 재일교포 북송에 매우 긴밀하게 관여하였다. 1960년 12월 27일, 교육문화성이 보통교육성과 문화성으로 분리된 이후 1961년 1월 21일, 초대 보통교육상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61년 11월 8일, 리주연의 뒤를 이어 무역상으로 조동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0월 23일,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내각 무역상에 유임되었다. 하지만 무역성 부상 계응태에게 밀려서 매우 곤란한 처지가 된 것으로 보이며, 1964년 2월, 주소 소련대사 모스콥스키와 리일경이 담화를 나누고 있는데 계응태가 끼어들어서 소련이 투기를 하고 있다고 마구 비난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당황한 리일경은 계응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며 로동신문에서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한 당혹감을 토로하였다. 모스콥스키는 리일경이 북한 지도부에게서 크게 불신당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결국 무역 문제에 있어 김일성의 불만을 샀는지 1964년 4월 27일, 무역상에서 경질되어 다시 리주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생사는 불명이며 궁지에 몰려 자살했다는 썰도 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