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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0:26:28

JG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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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투항공단 우데트(Jagdgeschwader 3 "Udet" : JG 3)

1. 개요2. 1941년3. 1942년4. 1943년5. 역대 지휘관6. 사용 기체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 유럽을 떨게 하던 루프트바페 소속의 전투기 부대 중 하나로 규모는 항공단(Jagdgeschwader)이다. 개전 전인 1939년 5월에 작센안할트주의 베른부르크(Bernburg)에서 정식으로 창설되어 폴란드 침공 작전을 필두로 전쟁 당시 유럽의 모든 전선에서 활동했다. 이 부대는 창설 당시만해도 보안을 위해 JG 231로 불렸으나, 프랑스 침공 무렵에는 JG 3으로 개칭되었다. 첫날 뫼즈강 주변 제공권을 장악한 이들은 프랑스 공군과 영국 공군의 각종 폭격기를 90대나 격추시켜 육군을 엄호하는데 단단히 한몫을 해냈다.

그중에서도 1비행단(I./JG 3)을 직접 인솔한 귄터 뤼초 소령의 활약이 눈부셨는데, 88기의 적기를 격파하는 동안 아군기는 고작 전투기 10대와 조종사 6명을 잃는데 그쳤다. 권터 뤼초 소령은 이 활약으로 말미암아 전임자 막스 이벨의 뒤를 이어 항공단장으로 취임하여 영국 본토 항공전을 지휘하게 된다. 항공단 별칭인 "우데트"는 사망한 에른스트 우데트를 기려 1942년부터 붙여진 것이다.

2. 1941년

항공단은 1941년 6월 22일부터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했고, 8월 30일에는 소련군을 상대로 한 공격에서 1,000번째 격추를 기록했다. 뤼초 소령은 10월 24일 모스크바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 3대를 잡아내면서 100킬을 달성한 두 번째 에이스로 등극했지만, 그 후 그가 전사하면 조종사들은 물론 국민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상부에 의해 출격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41년 6월 27일, II./JG 3의 지휘를 맡고 있던 로타 켈러(Lothar Keller) 대위가 공중 충돌로 사망하자 고든 골롭이 후임자로 임명된다. 그는 8월에만 18킬을 기록하는가 하면, 10월 18일 페레콥 지협(Perekop Isthmus)에서 9대를 격추하고 10월 22일에는 6대를 격파하는 등 10월 한 달 동안 37킬이라는 놀라운 격추행진을 거듭해 독일 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저명인사가 되었다. 10월 26일에 85번째 격추를 달성한 그는 백엽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았고 11월까지 II./JG 3을 지휘했다. 1941년 6월 22일부터 12월 5일까지 이 부대는 소련 공군기 1,298대를 파괴했으며, 공중전에서는 58대의 손실을, 지상에서는 10대의 기체를 잃는 수준에 그쳤다.

승진한 골롭의 뒤를 이어 칼-하인츠 크랄(Karl-Heinz Krahl : 1914~1942 / 24킬) 대위가 지휘봉을 잡은 II./JG 3은 1942년 1월 시칠리아의 코미소(Comiso)로 파견되어 몰타에 대한 공습 작전을 엄호하던 JG 53과 이탈리아 공군을 지원했다. 당시 이 부대는 열대형 전투기인 Bf 109F-4 Trop을 운용하고 있었다. 4월 말, 2그루페는 다시 동부전선으로 재배치되기 전 독일에서 잠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시칠리아를 떠났다.

3. 1942년

9월 중순, I./JG 3는 휴식과 정비를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조종사가 계속 러시아에 남아 III./JG 3에서 복무했다. Bf 109F-4로 운용 기종을 바꾼 그들은 1941년 12월에 네덜란드에 있는 기지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2년 1월 6일, 새로운 II./JG 1로 세포 분열했다.

1942년 초, JG 3는 드디어 우데트라는 명예로운 부대명칭을 받았고, 그 후 종종 우데트 항공단(Jagdgeschwader Udet)로 불렸다. 1942년 5월, 뤼초 소령은 JG 3의 대부분을 이끌고 러시아로 돌아와 하르키우 지역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그 후 크림 반도를 통한 집중적인 작전과 스탈린그라드로의 진군을 이어갔다. JG 3는 다시 루프트바페의 최고 선봉부대 중 하나가 되어 러시아 남부 전선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1942년 5월 28일에는 합계 전과 2,000대의 페넌트를 수여받았다. 8월 12일에 뤼초 소령의 후임으로 볼프-디트리히 뷜케(Wolf-Dietrich Wilcke) 소령이 JG 3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6월에 2그루페는 동부로 다시 이전되어 스탈린그라드 전선의 창날이 되어 혈투를 치렀고, 많은 적기를 격파했지만 손실 또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동안 본부중대는 피톰니크 비행장(Pitomnik Airfield)에 주둔했고, 뷜케 소령은 도시 전역에서 종일 항공 작전을 지휘했다. 1942년 여름 공세 동안 본부중대만으로도 137회의 공대공 승리를 기록했고, 그 중 97대가 항공단장 뷜케의 몫이었다.

러시아군이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자, JG 3의 지휘부는 포위 구역 바깥의 모로조프스카야-외스트(Morozovskaya-Öst)로 옮겨갔다. 11월 중순, JG 3는 1942년 말까지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6군의 생명줄을 지키는 비행장 방어 비행대(Platzschutzstaffel)를 파견해주었다. I. 및 II./JG 3에서 선발된 6명의 자원 조종사가 순환 방식으로 빠르게 쪼그라드는 스탈린그라드 경계 내에서 방어 편대를 형성했다. 그 임시부대에는 베르너 루카스(Werner Lucas : 1917~1943 / 106킬) 중위, 구스타프 프릴링하우스(Gustav Frielinghaus : 74킬) 중위, 게오르크 셴트케(Georg Schentke : 1919~1942 / 90킬) 중위와 쿠르트 에베너(Kurt Ebener : 57킬) 상사와 한스 그륀베르크(Hans Grünberg : 82킬) 상사 같은 역전의 베테랑들이 포함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피톰닉 비행장으로 수백톤의 보급품을 운반해오는 Ju 52 수송기들을 엄호하고 지상에 있는 기체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종종 2~3대의 전투기만 출격할 수밖에 없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위 공격의 마지막 6주(1월 중순까지) 동안 약 130대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그 댓가로 JG 3는 1942년 성탄절에 도시 상공에서 90번째 전과를 거둔 쉔케 중위를 잃었다. 1월 중순에 조종사들은 포위망에서 빠져나와 모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1943년 2월 2일에 도시가 소련에 항복했을 때 남아있던 지상 요원 30명이 포로로 잡혀버린다.

4. 1943년

II./JG 3는 1943년 2월 쿠반 교두보로 옮겨갔다. 볼프 우도 에텔(Wolf-Udo Ettel)은 이 무렵 JG 3의 떠오르는 스타임을 증명하여 1943년 3월에 28대, 4월에 36대, 5월에 20대를 떨궜다. 4월에는 케르치 반도 주변에서 집중적인 작전이 이어졌다. 7월, 이때 II./JG 3와 III./JG 3는 제4항공함대(Luftlotte 4)에 속해 있어서 쿠르스크 돌출부 주변에서 시작된 치타델레 작전(Operation Zitadelle)에 참가했다. 1943년 7월 5일에만 II./JG 3는 77대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했고 요아힘 키르슈너(Joachim Kirschner)는 9대를 쳐부쉈고 비행단장인 쿠르트 브렌틀(Kurt Brändle) 대위도 5킬을 주장한다.

1943년 중반부터는 독일 본토에 대한 연합군 공습이 증가함에 따라 JG 3의 각 그룹은 소위 제국 방어(Reichsverteidigung) 임무를 맡아 본국을 지키기 위해 차례로 독일로 소환되었다. I./JG 3는 4월에 독일로 돌아갔지만 6월까지는 기제 보충과 전환 훈련, 보충 교육을 받느라 요격 임무에 나가지 않았다. 날개 아래 곤돌라에 20mm 기관포 2문을 장착한 새로운 Bf 109G-6 Kanonenboote를 갖춘 I./JG 3는 폭격기 킬러로 훈련받았다. 이 긴 훈련 기간은 다른 전투항공단들처럼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요격에 투입되면서 큰 손실을 입는 사태를 막아줬고, 전투에 임하자 많은 수의 미군 폭격기를 격파해내기 시작하면서 성공적인 조치였음을 입증한다. 프란츠 슈바이거(Franz Schwaiger) 중위는 이때까지 I./JG 3의 최상위 에이스로 56킬을 기록했다.

1943년 늦여름까지 III./JG3는 Bf 109G-6과 Bf 109G-6/R6를 함께 운용했다. 한편, 독일로 돌아온 JG 3 본부중대는 묀헨글라트바흐(Mönchengladbach)에 기지를 두고 미군기들과 싸웠다. 12월 4일, 그때까지 181대의 적기를 장사지내 불사신으로 여겨졌던 빌헬름 렘케(Wilhelm Lemke) 대위가 제352전비 소속의 P-47과 공중전을 벌이다가 전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과 점령된 유럽 상공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대부분의 전투기 부대와 마찬가지로, JG 3는 1944년 초까지 항속거리가 부쩍 늘어난 P-51 머스탱 전투기가 늘어나면서 많은 숙련된 인력과 지휘관을 잃으며 회복할 수 없는 큰 손실을 입었다. 항공단장 뷜케 소령마저도 제4전투비행단의 P-51D 전투기에게 격추되어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후임자로 JG 3은 프리드리히-카를 뮐러 소령을 맞아들였으나 그조차도 5월 29일 잘츠베델(Salzwedel)에서 Bf 1-9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부실한 랜딩기어로 인한 착륙 사고로 사망했다.

5. 역대 지휘관


우데트 비행단의 에이스들 : 89대를 격추한 하인츠 케메트뮐러(Heinz Kemethmüller), 발터 달, 그리고 140대를 떨군 프리드리히-카를 뮐러

6. 사용 기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