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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5:26:22

쿠르스크

쿠르스크
Курск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px-Coat_of_Arms_of_Kursk.png
면적 190.75㎢
인구 450,977명(2021)
인구밀도 2,364명/㎢
시간대 UTC+3

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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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도시로 쿠르스크주의 주도이다. 해당 도시는 쿠르 강, 투스카르 강, 셈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졌다.

2. 역사

사람들이 정착하여 정식으로 장기 거주한 것은 최소 기원전 5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쿠르스크 시의 시초인 도시를 세운 것은 키예프 루스이며, 키예프 루스가 980년에 물류거점이자 방어거점으로 쓰기 위해서 요새를 건설한 것이 최초이다.

해당 도시를 건설한 것이 키예프 루스이므로 해당 도시가 처음 건설되었을 때, 주요 민족성분은 노르드족이었다.[1] 1237년 몽골 제국 바투 칸이 이끄는 군단이 쿠르스크시를 정복했다. 쿠르스크 지역은 몽골 제국의 통제를 받는 작은 공국들로 쪼개졌고 몽골의 수탈에 쿠르스크 지역은 황폐화되었다. 이를 참을 수 없었던 지역 공국의 왕자인 올렉과 스비아토슬라프가 1283년에 몽골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그 대가로 쿠르스크 시는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쿠르스크가 몽골 제국에 파괴된 시점에 노르드계는 절멸했다.

쿠르스크 시가 파괴된 이후 쿠르스크 지역은 여러 국가의 각축장이 되었다. 해당 지역에 지분이 가장 컸던 나라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해당 지분을 계승하였다. 14세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지배했지만, 러시아의 모태인 모스크바 대공국이 북쪽에서 그들 루스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자 민족의 성지인 키예프를 탈환하기 위하여 남진하는 과정에서, 쿠르스크로 전진하여 1508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쿠르스크 지역을 정복했다.
이 때, 쿠르스크의 민족성분의 최대는 루스족으로 당시에는 벨라루스계와 우크라이나계의 숫자가 많았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루스 차르국을 선포한 이후인 1586년에 쿠르스크 시가 재건되었다. 1283년에 몽골제국에 파괴된 이후, 303년만의 일이다.[2] 처음 도시가 새워졌을 때처럼, 요새를 세운 것이 재건의 시작이었다.[3] 1616년에 대규모로 확장공사를 한 뒤에 쿠르스크는 본격적으로 도시로써 기능하기 시작했다. 쿠르스크가 도시화되는 와중에 서쪽으로부터는 폴리투의 공격을 남쪽으로부터는 크림 칸국의 공격을 방어해야만 했다. 여러 나라의 공격을 막아내야만 했음에도 모스크바, 민스크, 키예프 등의 대도시들을 잇는 중간 무역도시로써 성장했다. 1783년 크림 칸국이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고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분활되어 사라지자, 쿠르스크는 더이상 국경도시가 아니게 되었다. 1797년부터 쿠르스크는 벨고로드 지방에서 분리된 쿠르스크 주의 도시가 되었다.

국경도시로써의 무역이점을 상실하고 안정된 키예프가 다시 성장하자, 도시의 성장동력을 키예프에 빼앗겨서 러시아의 주요 도시로써의 위상을 잃었다. 우크라이나계가 키예프로 떠나고 그 자리를 북쪽에서 내려온 러시아계가 채워서 우크라이나계의 도시였던 쿠르스크는 점진적으로 러시아계의 도시가 되어갔다. 이러한 러시아화는 1868년에 기차역이 세워지고나서 더욱 빠르게 가속화되었다.

쿠르스크는 주요 대도시의 위상을 잃었지만 주요한 공업도시로써 발전했다. 이미 1780년에 공교육이 시작되었고 1846년에 70개가 넘는 공장이 있었으며, 1868년에는 기차가 개통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우크라이나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소비에트 해방구가 설치되었다.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비에트에 협력하였음에도 정작 우크라이나 민족 지도자들이 소비에트로의 편입을 거부하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독립하려고 시도했다가 패전해서 합병당한 결과, 우크라이나 민족의 영역으로 인정받던 상당수의 영토가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양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쿠르스크의 우크라이나계 인구가 정리되었고 러시아 제국시절 키예프 총독부의 영역이었던 쿠르스크가 러시아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4]

소비에트 연방이 설립된 이후, 국경도시 민스크[5]와 키예프 그리고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도시로써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독소전쟁 때, 특히 부각되어, 키예프 모스크바를 점령하려고 계획했던 히틀러의 국방군이 모스크바와 키예프의 연계를 막기 위하여 대규모로 진격했고, 1943년 쿠르스크 전투의 중심지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거의 완벽하게 파괴된 이후 소련의 지원 아래에서 복구되었지만 그 옛날의 위상은 되찾지 못했다. 루스족의 주요도시 라인에서 탈락[6]한 이후 그 중요성이 많이 내려갔다. 소련의 해체 이후에 다시 국경도시가 되었지만, 우크라이나 키이우 벨라루스 민스크가 대규모 시장을 가진 상업도시로써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고, 러시아 경제가 자원에 의존하게 된 관계로 내륙의 도시인 쿠르스크는 어떠한 성장압력도 받지 못해서 현재는 흔한 러시아의 저개발 지방도시 중 하나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다.

[1] 루스인들은 분명히 슬라브족인데, 왜 노르드족이냐면, 슬라브는 슬레이브의 어원이 될 정도로 고대에는 오직 지배당하는 민족이었다. 북게르만의 일파인 노르드족이 키예프 지역으로 넘어와 슬라브인들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키예프 루스였다. 키예프 루스는 노르드인들이 슬라브인들을 제압하고 세웠으나 선주민인 슬라브인들의 머릿수가 훨씬 많아서 역동화를 당했는데, 이들이 훗날 곧 루스족이 된다. [2] 몽골제국이 쿠르스크 시를 파괴한 이후 쿠르스크란 명칭은 도시의 명칭이 아닌, 지역의 명칭으로 불렸다. [3] 키예프 루스는 북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루스 차르국은 서쪽을 방어하기 위해서 지었다는 차이점이 있는데, 따라서 도시의 위치도 파괴 전과 차이가 있다. [4] 다만 쿠르스크 시 자체는 이미 러시아계가 우크라이나계의 숫자를 넘어섰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도 해당 도시를 러시아의 국경도시로써 러시아에 넘겨주고 쿠르스크주의 절반만 가져오려고 했다. [5] 폴란드와 국경인 곳에 있었다. [6] 한국으로 치면 과거에는 주요한 도시였지만 현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전주시 나주시 혹은 경주시같은 도시라고 보면 된다. (애초에 주(州)자 돌림의 도시들은 남북국시대 고려 때 건설된 도시들인데, 조선 시대에 새로 개발되거나 성장한 도시들에 밀리거나 한국이 공업화하면서 전통적인 농촌지역이 신흥 공업지역에게 밀리면서 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