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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8 03:44:13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

파일:attachment/leonardodacecilia.png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
Dama con l'ermellino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가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제작 1490년
사조 전성기 르네상스
종류 초상화
기법 호두 판자에 유채 템페라
크기 39cm × 54cm
소장
[[폴란드|]][[틀:국기|]][[틀:국기|]]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1. 소개2. 상세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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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에르마인을 안은 숙녀"라고도 불린다.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의 걸작으로, 1489년부터 1490년까지 약 1년에 걸쳐 그려졌다고 한다. 현재 폴란드 크라쿠프의 차르토리스키 미술관에 소장중이다.

2. 상세

남아 있는 다 빈치의 작품 여성을 그린 초상화 네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림의 모델은 밀라노의 지배자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Ludovico Maria Sforza, 1452 ~ 1508) 대공의 애첩 체칠리아 갈레라니(Cecilia Gallerani, 1473 ~ 1536)[1]로, 특이하게 흰 담비[2]를 안고 있다.

근대 이전의 서양화는 일종의 읽는 그림이었기 때문에 의미없이 그린 그림이 만무했다. 그렇기에 체칠리아가 안고 있는 담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우선 담비는 유력한 귀족이나 왕족들의 옷에 쓰인 귀한 모피이기 때문에, 담비를 든 사람이 상류계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또한 중세 유럽에선 흰 담비는 순백의 상징으로, 모피가 더럽혀지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에 체칠리아의 순수하고 청정함을 드러내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스포르차 가문의 상징이 바로 담비다. 다 빈치는 이를 통해서 체칠리아가 스포르차 대공의 총애를 받는 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선 흰 담비를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개인적 상징으로 해석하여, "체칠리아가 루도비코를 품에 안았다"라는 식의 성적인 해석도 하고 있다.

폴란드 귀족 아담 차르토리스키 1789년에 구입해 자신의 어머니 이자벨라 차르토리스키가 세운 치르토리스키 미술관에 소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0년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하여 일어난 폴란드 11월 혁명이 일어났고 아담 차르토리스키가 혁명에 가담했다. 그리고 이자벨라 차르토리스카는 이 그림을 숨겼다. 11월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차르토리스키 가문은 국외 망명이 불가피해지게 되었다. 드레스덴을 거쳐 파리에서 머무르다가 1882년이 되어서야 폴란드 크라쿠프로 돌아올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나치 독일에 의해 약탈되어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황제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1940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가 자신의 집무실에 장식하기 위해 이 그림을 총독부가 있는 크라쿠프로 옮겼다. 이후 이 그림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한스 프랑크의 자택에서 발견되어 폴란드에 반환되었고 원래 자리인 차르토리스키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나치에게 약탈되었고, 어느 나치 독일 고관이 스위스 은행 비밀금고에 은닉한다. 세간에서는 전쟁통에 소실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주인공 일행에 의해 발견된다. 그러나 주인공의 판단에 의해 공개되지 않고 다시 비밀금고에 잠들게 된다.


[1] 평민 신분이지만 미모와 교양을 겸비해 당대 밀라노의 남성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녀를 연모했다고 한다. 그중 한명이 스포르차 대공이었고, 연인관계로 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스포르차 대공이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얻자 그의 총애를 잃었고, 그후 조용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2] 흰담비로 널리 알려진 북방족제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