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중앙본소가 있던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 대흥동[1]의 일제강점기 때 사진 |
1. 개요
보천교( 普 天 敎)는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이 창립한 증산계통의 신흥종교이다. 이후 증산교에 무시 못할 영향을 주었다.[2]2. 창립
1880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차경석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 접주(接主)로 관군에게 처형당한 차치구(車致久)의 장남으로, 일찍부터 동학운동에 가담하여 전라북도 순회관(巡廻官)을 지내기도 하였다.그는 증산계 종교의 비조(鼻祖) 증산 강일순을 만난 뒤로는 자신의 이종사촌 누이인 고판례를 강일순의 부인으로 추천할 정도로 착실한 제자가 되었다.[3][4] 강일순의 사망 이후 흩어졌던 그의 제자들이 1911년 고판례의 종교 체험을 계기로 재집결하여 선도교라는 신종교를 세울 때, 차경석은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이 크게 늘어나게 되자, 차경석은 1918년 교권을 장악하고 신도들과 고판례와의 접촉을 차단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그를 떠나 별개의 종단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차경석은 교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1920년에는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 조직으로 묶고, 55만 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하기도 하였다. 1921년 차경석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로 천제(天祭)를 올리고[5] 국호를 <대시국大時國>[6], 교명을 <보화普化>로 선포하여 나라를 세울 것 같은 행보를 이어갔고, 이 때부터 교단 안팎에서는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떠돌아 갑자등극설(甲子登極說)·기사등극설(己巳登極說)로 구체화되고, 민간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라 부르게 되었다.[7]
1922년에는 ≪보광普光≫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였는데, 건축자재를 백두산의 원시림에서 가져다 쓰면서 신도수가 600만[8][9]이라고 할 정도로 교세가 대단하였고, 한반도 최대 종교였다.
보천교 진정원의 십일전, 나중에 조계사 대웅전이 된다.
교세가 매우 커지자, 차경석은 전라도 정읍에 보천교 총본산인 '십일전'을 세웠는데, 군산항을 통하여 만주에서 소나무를 들여오기까지 하여 조선시대 경복궁 근정전에 비견될 만큼 크고 아름다운 규모로 세웠다. 또한 보천교에서 쓰던 커다란 종은 한 번 치면 정읍의 보천교 본당에서 수 km 떨어진 익산에까지 잔잔하게 종소리가 울렸다고 전해졌는데 나중에 일제가 무기제조용으로 압수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차경석이 살아있을 1923년에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문제적 종교로 감시받던 신토계 신흥종교 오모토와 접촉이 있었다.[10] 식민지 조선과 일본 본토에서 각각 문제적 종교로 감시받던 양 교단이 서로 접촉하여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일본 정부 보기에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3. 독립운동 지원
보천교는 상해임시정부 설립자금 5만 원(현재 추산가 10억 원)을 대기도 했고, 보천교가 일제에 문제종교로 찍혀 감시를 받은 것도 독립자금을 전달하려다 발각되어서였다. 보천교의 조직체계는 교주 차경석이 있고 그 아래 각지에 60인의 고문이 있었으며 고문 아래에 6인조-12인조-8인조-15인조 등의 조직을 갖췄는데, 각각 30원-15원-10원-5원을 내어 일부는 제사 비용으로 쓰고 잔금은 전라도 정읍에 있는 본부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전달되었던 것이다.당시에 보천교의 재정간부 김홍규는 독립자금 당시 10만 원 (현재 추산가 20억 원)을 조성하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투옥되었고,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11]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의 부인(박자혜 여사)은 보천교 간부였고, 독립자금 지원을 위해 만주 정의부 독립군과 보천교 본부를 연결하였다. 이외에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재봉, 김철수에게도 보천교단은 많은 독립자금이 제공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자혜도 보천교 신자였다고 전해진다.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에 의하면, 1924년 초에 독립단체 정의부가 결성된 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을 국내로 파견했을 때 박자혜 여사가 보천교 북(北)방주인 한규숙을 중개했다고 한다.
일제는 증산 계열 교단을 독립운동의 소굴로 보고, 이를 대외적으로는 유사종교[12]라 하여 탄압을 하였고, 내부적으로는 보천교 분열작전에 들어간다. 이에 보천교 고위 간부였던 이상호를 내세워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파문당한다.[13]
하지만 이러한 독립운동 지원이 차경석의 야망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있다. 즉 자신이 동방연맹의 맹주가 된다는 예언을 확실시 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고 독립된 후 보천교를 국교로 하는 새 조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의견이다. 더욱이 1920년대부터 대동아공영론과 유사한 주장을 하고 시국대동단을 결성하고 조선총독부와도 교류하는 등 친일행위도 있었다.[14]
4. 몰락
보천교 간부들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한문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던 ( 정감록 등) 도참서에 나오는 진인이 바로 차경석이라고 주장하며 보천교에 귀의하라고 포교하였다.한편 차경석은 날이 갈수록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잃어갔고,[15][16] 차경석이 1928년에 이르러 아내 이씨로부터 '영안을 통하여 보니 상제님의 자리에 삼황오제신이 들어서고 상제님께서 풀대님에 삿갓을 쓰고 보좌를 떠나시더라.'는 말과 ‘삼황오제신은 곧 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라는 말을 듣고 혹하여 차치구를 신앙대상으로 받들고 교리도 유교식으로 바꾸려 했으나, 내부적인 큰 반발에 직면했다. 이에 보천교 혁신운동에 의해 고위 간부들이 나와 별도로 교파를 차리게 되었다.
또한 1936년에 차경석이 사망하고, 총독부가 유사종교해산령을 발표함에 따라 교단도 해체되었다. 보천교만이 아니라 증산 계통의 다른 여러 교단들이 해산되었다.[17]
광복 이후 남은 교인들이 교단을 다시 세웠다. 그리하여 지금도 보천교가 남아있으나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는 전부 사라졌다.
동학에 이어 보천교까지 몰락하고 뒤이어 8.15 광복 이후로 미국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면서 호남 지역의 종교적 헤게모니는 사실상 개신교로 넘어가게 된다.
5. 후대의 교리적인 영향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태극도의 교주 조철제가 최초로 증산 계통 종교에 발을 들일 때 입교한 첫 단체가 보천교였다.[18] 그래서인지 조철제는 스스로 천자를 칭하였고 세간에서 차경석이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렸듯 조천자(趙天子)라고 불렸다.증산도 초대 교주 안세찬의 부친이 보천교 신자였고, 교단의 역사에 보천교를 편입시켰다.[19]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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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에서 그래픽화한 보천교 본소 |
보천교가 만들었던 보화문도 십일전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내장사의 대웅전으로 바뀌었다. 2012년 10월 말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2015년에 복원되었다. #
7. 관련 문서
[1]
2021년 3월부로 공식적으로 대흥리로 분리되었다.
[2]
신한부 종말론, 교주 우상화, 전재산 헌납 등
사이비 종교가 가지는 많은 특징을 가졌다. 문제는 이게 1세대 증산교단이라는 것이다.
[3]
후대의 증산종교들은 강일순이 예언적 안목으로 차경석을 제자로 받지 않으려 했으나, 차경석이 워낙 고집스레 제자되기를 원하므로 받아들였다고 서술한다. 그래서 결국 차경석을 제자로 받으면서도 "네가 나를 다시 깊은 물로 끌어들이는구나."라고 한탄하거나, 제자들과 다같이 멱을 감다가 갑자기 차경석의 다리를 붙잡고 "이무기 잡았다!" 하고 외쳤다가 차경석이 "제 다리인데요?" 하자 모르는 척 "어, 그랬냐?" 하며 놓아주거나 차경석에게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꿈만 꾸는 자도 죽으리라." 등 미래를 내다본 발언을 하였다고 설명한다.
[4]
차경석이 아닌 다른 제자들 입장에서 차경석을 좋게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안 좋은 말이 수록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증산도 역시 보천교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아, 자기네 경전 <도전>에 차경석에게 부정적인 내용을 많이 실었다. 대순전경과 천지개벽경에서는 강일순이 차경석을 제자로 받아들이려 하자 김형렬 등 다른 제자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으나, 오히려 강일순이 "용이 물을 얻으려면 가시밭길이라도 가야 한다."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쪽이 더 말이 되는 게, 정말로 강일순이 차경석을 그토록 경계했다면 차경석이 추천한 고판례와 결혼할 생각을 했을까?
[5]
이때 차경석은 치밀한 준비 끝에 제사를 지내고 재빨리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도망갔다. 일제가 차경석 검거에 실패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차경석이 도술을 부려 일경의 감시를 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6]
강증산이 후천개벽 직후에 세우겠다던 나라 이름이다.
[7]
차경석의 큰아들은 차태자라고 불렸다.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9]
보천교에 관하여 서울대 윤이흠 교수는 600만 간부만 55만으로 추산,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 303~600만, 1925 미 영사 밀러의 워싱턴 보고서에서는 600만으로 추정.
[10]
아이러니한 점은 사실 당시
오모토는 성향이 상당히 우익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제국주의나
국가신토와는 다른 방향으로 우익적이었던 탓에 정부 차원에서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신자들에게 신내림을 체험하게 하고 주술이나 종말론적인 면을 이야기하던 것도 정부나 사회에 찍힌 이유였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우익적이고 보수적인 지식인이나 사회의 하층민들에게
오모토가 인기가 있었다. 말하자면 오모토의 성향은 양날의 칼이었다.
[11]
김홍규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2]
일본은 일본 신도, 불교, 천주교, 개신교 이외에 조선에서 발한 종교를 '유사종교'라 하여 인정치 않고 탄압하였다.
[13]
이상호는 이후 1928년 전북 김제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종교단체를 세웠다. 1931년에는 김제에 있던 고판례를 끌어들여 증산계 종교 중에서는 나름 세력이 커졌다. 1936년 차경석이 죽은 후 일제의 유사종교해체령에 따라 보천교 및 기타 종교들이 해산당할 때 동화교 역시 해산당했다.
[14]
이런 면은 친일행위를 통해 반체제적인 모습을 면피하려는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15]
그 이유는 아무리 수련을 해도 제자는커녕 자신도 도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대의 증산교단들은 고송암이라는 도인이 증산에게 맞서 초능력으로 방해를 벌이자 증산이 그 위기를 해결하고자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공부를 해도 도통할 수 없는 구조로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세한 내막은 도전 5편 194장
두번째 해석
[16]
증산계열 종교에서 도통이란 불교의
해탈과 가치가 맞먹거나 혹은 더 높다. 증산교단들의 교리에 따르면 도통하게 되면 일원세계(一元世界)가 눈앞에 있고 사해중생(四海衆生)이 마음에 나타나며, 모든 이치가 뚜렷이 드러나고 만상(萬象)이 펼쳐지며 풍운조화(風雲造化)가 마음대로 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이 하고자 하는 대로 이루어지며
천지가 내 마음과 일체가 되고
삼교(三敎)를 두루 쓰며,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고 한다. 이는 수석제자 김형렬의 증언이다. 대체로 최근에 나온 증산교단에서는 도통은 후천개벽이 마무리 된 이후에 얻게 되는 경지라 가르친다.
[17]
다 망한 것은 아니었다. 유사종교해산령 발표 직후인 1937년경
강증산의 외동딸 화은당 강순임이
증산법종교를 창교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8]
태극도에서는 이 부분을 오히려 조철제의 꿈에서 증산이 나타나 "나는 구천상제요, 너는 옥황상제라." 하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이때는 아직 증산이 사망하기 약 2개월 전이고 조철제는 단 한번도 생전의 증산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또 진위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19]
보천교를 일러 '증산도의 전신(前身)'이라 말할 정도. 근데 이렇게 되면 보천교와 척을 진 고판례의 행적에
반대하는 행위가 된다
[20]
족보나 호적으로는 차일혁의 부친이 차경석이 아니라고 한다. 사생아나 서자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