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昌郞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신라의 자객.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조선 시대 이후 문헌에서만 언급되는 인물이다.2. 전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8살의 나이에 신라왕과 꾀해서 백제왕을 죽이기 위해 백제로 가서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백제왕은 황창랑을 궁중에 불려들어 춤추게 했는데, 황창랑은 그 자리에서 백제왕을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황창랑도 백제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무명자집에 의하면 그가 백제에 복수를 꾀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백제에서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실존인물인가?
신라왕이 보낸 자객에 죽은 백제왕이 없는 점[1]과 황창랑 일화가 퍼졌던 조선시대에도 관창의 와전이라는 말이 있는 점을 보면 실존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또한 황창랑에게 암살당했다는 분서왕을 죽인 자객은 신라 자객이 아닌 낙랑군 태수가 보낸 자객이었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
4. 사료
황창랑은 신라 어느 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여덟 살 난 어린애로써 신라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자에 가서 검춤을 추니 저자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한다. 후세에 탈을 만들어 그의 모습을 본뜨고 처용무(處容舞)와 함께 놀이에 아울러 행해지나, 사전(史傳)에 상고하면 도무지 그런 기록이 없다 쌍매당(双梅堂)[2]은 말하기를, “청랑(淸郞)이 아니요, 기실은
관창(官昌)의 와전(訛傳)이라.” 하여, 변(辨)을 지었지마는, 그것도 억칙(臆測)의 설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 이제 그 춤을 보건대, 빙빙 돌면서 돌아보며 흘겨보며 휙휙 번쩍번쩍, 지금에도 늠름히 아직 생기가 있는데, 그 춤은 절주(節奏)만이 있고 가사(歌詞)가 없기로 아울러 시를 짓는다.
동문선 속동문선 동도악부[3] 칠수 中
동문선 속동문선 동도악부[3] 칠수 中
황창랑(黃倡郞)은 신라 사람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나이 일곱 살 때에 백제(百濟)의 시가에 들어가서 칼춤을 추니, 구경꾼들이 담처럼 둘러섰다. 백제의 임금이 듣고 그를 불러다 보고는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라고 명령하였다. 창랑은 기회를 타서 백제왕을 칼로 찔렀다. 백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겨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탈을 만들어서 칼춤 추는 형상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탈춤이 전하고 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
관창이 황창랑으로 와전된 것인데(官昌訛誤黃昌郞)
역사엔 칼로 치던 장소 징빙할 수 없네(史傳無徵擊劍場)
여덟 살의 어린아이로 보복을 계획하여(八歲眇童謀釋憾)
술동이 앞에서 백제 왕 깜짝 놀라게 했네(樽前驚起夫餘王)
창랑(昌郞)은 여덟 살 때 신라 왕을 위하여 백제에 보복할 계획을 하고 백제의 저자에 가서 칼춤을 추었다. 이에 백제 왕이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칼춤을 추게 하였더니, 창랑은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그래서 후세에 가면(假面)을 만들게 되었다. 창랑은 바로 관창(官昌)의 와전이다.
임하필기 해동악부 황창랑무(黃昌郞舞)
역사엔 칼로 치던 장소 징빙할 수 없네(史傳無徵擊劍場)
여덟 살의 어린아이로 보복을 계획하여(八歲眇童謀釋憾)
술동이 앞에서 백제 왕 깜짝 놀라게 했네(樽前驚起夫餘王)
창랑(昌郞)은 여덟 살 때 신라 왕을 위하여 백제에 보복할 계획을 하고 백제의 저자에 가서 칼춤을 추었다. 이에 백제 왕이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칼춤을 추게 하였더니, 창랑은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그래서 후세에 가면(假面)을 만들게 되었다. 창랑은 바로 관창(官昌)의 와전이다.
임하필기 해동악부 황창랑무(黃昌郞舞)
신라의 황창랑이 백제에서 검무 추니(新羅劍舞黃昌郞)
저잣거리 구경꾼들 담장처럼 둘렀다오(百濟市中似堵墻)
아비 위한 복수에 죽음 어찌 두려울까(爲父報仇寧畏死)
분서왕을 단칼에 죽일 것만 기약했다오(只期一刺汾西王)
신라의 황창랑(黃昌郞)이 백제의 시장에서 검무(劍舞)를 추자 구경꾼이 담장처럼 둘러섰다. 백제왕이 불러서 당에 올라 춤을 추게 하자 황창랑이 이를 기회로 왕을 찔러 죽였다. 이는 그 아비가 백제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에서는 낙랑 태수(樂浪太守)가 자객을 보낸 것이라고 하는데 자세하지 않다.
무명자집 시고 제6책 영동사 104
저잣거리 구경꾼들 담장처럼 둘렀다오(百濟市中似堵墻)
아비 위한 복수에 죽음 어찌 두려울까(爲父報仇寧畏死)
분서왕을 단칼에 죽일 것만 기약했다오(只期一刺汾西王)
신라의 황창랑(黃昌郞)이 백제의 시장에서 검무(劍舞)를 추자 구경꾼이 담장처럼 둘러섰다. 백제왕이 불러서 당에 올라 춤을 추게 하자 황창랑이 이를 기회로 왕을 찔러 죽였다. 이는 그 아비가 백제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에서는 낙랑 태수(樂浪太守)가 자객을 보낸 것이라고 하는데 자세하지 않다.
무명자집 시고 제6책 영동사 104
5. 기타
- 2001년 만화 백제왕조 700년이라는 어린이 만화책에서는 신라 출신이지만 자객을 보낸 대상이 신라왕이 아닌 낙랑군 태수의 사위 보육으로 나오며[4], 보육이 황창랑을 꼬드겨서 분서왕을 살해하도록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황창랑은 도주하다가 백제 공주에게 잡혀서 사망한다. 아마도 위의 기록 + 이야기 삼국야사라는 삼국시대 야사를 다룬 책에서 실린 내용을 종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 조선 후기의 무관 백동수가 저술한 무예도보통지에 따르면 황창랑을 검술 본국검의 시조로 적고 있다. 정확히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황창랑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조선 검술의 시조격으로 삼겠다는 뜻에 가깝다. 본국검 항목 참조.
- 조선시대 궁중무용인 '황창랑무(黃昌郞舞)'는 황창랑의 이름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