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강사에 대한 내용은 황의영(강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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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나가미즈 기에이(長水義瑛) |
이명 | 이원영(李元永)·이만녕(李萬寧) |
자 / 호 | 학범(學凡) / 홍선(弘宣) |
본관 | 장수 황씨(長水 黃氏)[2] |
출생 | 1919년 9월 10일 |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3] 대평마을 632번지 | |
사망 | 2013년 1월 20일 (향년 93세) |
광주광역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79호 |
상훈 | 건국포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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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3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2. 생애
1919년 9월 10일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대곡리 대평마을 632번지에서 아버지 황옥주(黃玉周, 1881. 9. 7 ~ 1954. 7. 22)[4]와 어머니 단양 우씨[5] 사이에서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립 도쿄제국상업학교(東京帝國商業學校)[6]에 입학하였다. 1942년 3월 고학 끝에 졸업한 뒤 오사카시에서 회사에 취직하여 근무하던 중 1943년 12월 10일, 돌연 사직하고 귀국하여 이후에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에서 지냈다.그러던 1944년 3월 22일 오후 4시경 완도군 신지면 신리 가와히가시 토쿠카이(河東德開)의 상갓집에서 조문객으로 온 마츠무라 에이슈(松村永鍾)·니야마 칸코(丹山還鎬)·이시카와 우켄(石川禹鉉)·가네우미 자이카(金海在夏)·니야마 에이후(丹山榮夫) 등에게, " 대동아전쟁에서 미국과 영국은 물자가 풍부하지만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므로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하면 조선은 독립되고 정치는 회복될 텐데, 너희들은 집과 땅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인가."라고 말하며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할 것이라는 시국에 대한 소문을 유포했다가 이후 함께 자리에 있던 양 아무개가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44년 6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및 육·해군형법 위반, 사기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에는 초등교사로서 35년간 봉직하며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뒤 퇴임했다. 퇴임할 때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으며, 이후 2013년 1월 20일 오후 7시 50분 광주광역시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2013년 1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