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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홍원식(洪元植) |
출생 | 1877년 10월 13일 |
경기도 화성유수부 공향면 제암동 넘말 (현재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넘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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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9년 4월 15일 (향년 41세) |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 | |
본관 | 남양 홍씨[1]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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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제암리 학살사건의 희생자.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홍원식은 1877년 10월 13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공향면 제암동 넘말(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넘말)에서 아버지 홍순화(洪淳華)와 어머니 박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제암리에서 자랐고 청년이 된 후 한성부 주둔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1대대 군인으로 서소문 병영에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07년 일제가 정미 7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키자, 그는 정미의병에 참여하여 충남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전투에 참여했으며 어떤 활약상을 남겼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1914년 3월 29일 고향으로 돌아온 홍원식은 기독교 권사가 되어 학교를 세웠고, 제암리 교회의 안종후와 천도교인 김성렬(金聖烈)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를 결성했다. 그러다가 일본 헌병 2명이 그를 감찰하러 오자 총으로 쏴 죽이고 몇년 간 숨어지냈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1919년 3월 31일 향남면 발안장터에서 1,0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인 학교와 주재소, 상가 등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 경찰과 보병들은 총탄을 발포해 많은 군중을 살해하고 체포된 이들을 가혹하게 고문했다.
이에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이 백낙렬과 안정옥, 김흥렬, 이정근의 주도하에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때 홍원식도 가담하여 제암리를 대표하여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4월 3일 오전 11시, 200여 명의 군중이 장안면 사무소에 모여 면사무소를 파괴했고, 뒤이어 우정면 사무소에 들이닥쳐 서류와 집기류를 파기했다. 이후 천여 명의 군중은 4월 5일 화수주재소 앞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고, 주재소에 돌을 던졌다. 이때 일본 경찰이 그들에게 발포해 많은 이들이 죽거나 부상당하자, 시위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해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었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일제는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파견하여 수촌리를 급습해 김교철,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을 체포하고 진압 과정에서 집을 불태우고 많은 주민들을 살상했다. 그 결과 제암리의 이웃 마을인 수촌리는 전체 42채의 가옥 중 38채가 불탔고, 그 외에도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호, 사망자 46명, 부상자 26명, 검거인원 442명에 달했다. 4월 15일 400여 명이 발안 장터에 모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발안 주재 순사는 이들을 해산시켰다. 일제 경찰은 이와 같은 만세 운동의 주동자가 향남면 제암리의 기독교도와 천도교도라고 파악하고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4월 15일 정오,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이 제암리 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이고 제암리와 인근 마을의 주민 약 20여 명을 제암리 교회로 모이게 했다. 아리타는 주민들을 교회 안에 가둬놓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부하들에게 불을 지르고 교회에서 탈출하려던 이들을 향해 집중 사격하게 했다. 이로 인해 홍원식을 비롯한 주민 20여 명이 참혹하게 죽었고, 홍원식의 부인 김씨는 남편을 구하려고 현장으로 달려왔다가 일본군의 총격에 사망했다. 아리타 중위는 이어 제암리 마을의 가옥들에 불을 질렀고 이웃 마을인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 신자 6명을 나무에 묶어 총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홍원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부인 김씨에게도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2년 9월 대대적인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한 뒤 발굴된 유해를 23위의 묘로 안장했고, 1983년 7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1]
당홍계 34세 식(植) 표(杓)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