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c0000><colcolor=#ffffff> 혼다 소이치로 [ruby(本田宗一郎, ruby=ほんだ そういちろう)]|Soichiro Hon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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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6년 11월 17일 |
일본 제국
시즈오카현
덴류구 이와타군 고묘촌 (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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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1년 8월 5일 (향년 84세) |
도쿄도 분쿄구 준텐도대학 의학부 부속 준텐도병원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후타마타 무네요시 소학교 (졸업) |
가족 |
아버지 혼다 기헤이 어머니 혼다 미카 동생 혼다 벤지로 아내 혼다 사치 장남 혼다 히로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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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공학자, 기업인. 혼다의 창업주로, 마쓰시타 고노스케, 이나모리 가즈오 등과 함께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칭해지는 인물이다.2. 생애
1906년 11월 17일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서 태어났다. 대장장이인 아버지와 직공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철물점에서 자전거를 수리하는 일을 익혔고 마을에서 본 자동차를 보고 감격하거나 자전거를 빌려 비행기 전시회에 가곤 하는 등 꿈을 키워갔다. 그만큼 학교 교육에 부정적인 인물이었는데 자전거 페달 고무로 성적표 확인 도장을 위조하는 비범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특히 소이치로가 유별난 것은 학교 공부를 싫어한다는 위인들도 창의적이었다고 좋아했던 과목인 서예를 가장 싫어했으며 독서도 지루하다는 이유로 멀리했다고 한다.15살에 도쿄로 상경해 자동차 수리소 수습생(修習生)으로 일을 시작해서 22세가 되던 1928년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동차 수리소를 차리게 된다. 그 후 1937년 도카이 세이키(株式会社東海精機)라는 부품 공장을 세워 토요타에 납품했으나 미군의 공습과 1945년 미카와 지진으로 인해 공장을 잃고 복구 가능한 것을 토요타에게 매각해서 받은 45만 엔으로 1946년 10월 혼다 모터스의 전신인 혼다 기술연구공업을 창립하고 2년 후 첫 양산형 오토바이를 생산해낸다.
1949년 친한 친구인 후지사와 타케오를 고용해 재무 부분을 총괄하게 하고 자신은 기술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이후 탁월한 기술능력과 마케팅을 바탕으로 회사를 대기업으로 성장시켰으며 1959년 미국 현지에 첫 혼다 오토바이 딜러를 열게 된다. 그리고 1973년에 혼다의 사장직에서 물러나 은퇴하기 전까지 최고기술고문이라는 직함으로 기술연구분야에 전념하게 된다. 이 같은 활동으로 1982년 미 기계기술자 소사이어티로부터 공로메달을 수여받았으며 1989년 미국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헌액되는 개인적인 경사도 누렸다. 은퇴 이후에는 혼다 재단을 설립하고 사회 공헌 활동을 했으며, 레이싱과 행글라이딩 등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2세 경영의 부정적인 점을 염려하여 자신과 친구 후지사와 타케오의 아들을 절대로 혼다에 입사시키지 말라는 약속을 했다. 물론 부전자전인지 아들인 혼다 히로토시도 기술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고 그 결과물이 무겐 모터스포츠.
그 후 1991년 8월 5일, 간질환으로 타계했다. 벨기에 그랑프리 개최 며칠 전이었는데, 당시 혼다 소속이었던 아일톤 세나는 우승컵을 혼다 소이치로에게 헌정하여 그의 열정을 기렸다. 그가 타계했을 당시의 일화도 인상깊은데, 그가 타계한 후 유족들과 지인들이 조문객들을 오는 족족 돌려보내 버리는데 이는 다름 아닌 혼다 회장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는 임종 당시 유언으로 "회사장을 지내거나 장례식을 치르지 마라. 내가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인데 이 사회에 폐를 끼칠 수 없다. 내 장례식에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올 것이고 그러면 교통 체증이 일어난다. 자동차 회사의 책임자가 할 도리가 아니다."고 했다는 것. 유족들과 지인들은 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장례식 대신 회사와 공장별로 '감사 모임'이라는 이름의 추모 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전국 각계 계층의 인사들이 찾아왔으며, 그 수는 6만 명이 넘었다. 단순히 생전 친구들, 정재계 인사들 뿐만 아니라, 혼다의 바이크,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F1 광팬 등 혼다가 만든 제품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중에는 특이하게도 혼다 회장과 아무 일면식도 없는 라멘가게 사장도 있었는데, 그는 '내가 이 회사에 아는 사람은 없지만, 라멘 배달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혼다 커브를 만들어 주신 소이치로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23년만인 2014년, 마침내 혼다제트가 발매되면서 혼다 회장의 비행기를 만든다는 평생 소원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비록 항공사업은 아직 부채를 메꾸고 있지만 출시 초기부터 100대씩 판매되어서 차츰 흑자로 돌아서려는 추세라고.
3. 일화
독학으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음에도 혼다를 재벌들 사이에서 거대 기업으로 키워냈고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은 덕에 기술에 관해 고집이 엄청나게 강했다고 한다. 또한 실패가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몸을 사리는 것보다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맞붙어 보려는 용기와 열정을 높게 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창립 초기부터 오토바이 레이스나 포뮬러 1 같은 모터스포츠 세계에 도전하고 여러 진취적인 기술적 시도들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자신의 직종이 직종인지라 언제나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관리와 점검을 강조했다. 자동차 리콜 같은 사태를 거부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도덕의 결여"라고 호되게 비판할 정도였다.직원들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일반 사람들이 어른[1]을 부르던 애칭이던 "오야지"라고 불리는 것을 더 선호했다. 과거 혼다 출신의 기술자들의 회고록에서 혼다 소이치로를 대부분 오야지(オヤジ)로 써놨다. 정장차림의 말쑥한 사장보다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차림 공장장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 것. 한번은 훈장 수여 관련으로 쇼와 덴노를 알현하게 됐는데 이때도 흰색 작업복 입고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리는 통에 궁내청과 혼다 측 임원들이 사정사정하여 그날만은 특별히 정장을 입었다고 한다.[2]
이처럼 강한 고집으로 인해 하급자들과 발생하는 갈등을 잘 조율하고 경영 업무 전반을 맡은 소이치로의 오른팔 후지사와 타케오도 명 경영자로 칭송받으며, '본업에 전념한다'는 사훈을 내세워 정치권과의 교류 역시 거부하며 죽는 날까지 공업에만 몰두했다. 일본 경제에 만연한 정경유착에서 자유로웠던 인물. 다만 이러한 고집 때문에 말년에는 여러 실패들을 겪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엄청난 공랭식 엔진 덕후라 자동차 업계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수랭식 엔진 도입에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공랭식 덕후 기질로 인해 혼다의 대중차 시장 진출을 이끌기 위해 개발된 야심작 혼다 1300이나 혼다가 자체 제작한 마지막 F1 레이스카인 RA302 등에 공랭식 엔진을 적용했다가 대실패를 겪기도 했고, 결국 이 둘의 실패가 혼다 소이치로와 후지사와 타케오의 명예직으로의 은퇴를 불러오게 되었다.
일본 넷상에서는 혼다가 생전에 한국과 관련되지 말라는 말을 했다는 얘기가 널리 퍼지고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 #에 따르면 대만계 일본인 경제평론가 추영한(邱永漢, 1924.3.28 - 2012.5.16)이 그에게 "해외에 있는 혼다 공장 중 가장 상태가 좋은 곳과 가장 안 좋은 곳이 어디냐"라고 물었을때 전자는 대만, 후자는 한국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혼다가 한국으로 진출하면서 합작회사를 세웠는데 기술제휴를 맺은 한국 업체가 자체적인 기술력을 갖게되자 한국 내 지분을 자신들이 살테니 돌아가달라는 통보를 받았고 결국 한국 시장에서 철수를 결정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했다고 한다. 정황상 혼다가 한국에서 제휴하고 있던 업체는 기아기연[3]으로 추측되는데 실제로 혼다는 1979년 기아기연과의 합작사업을 청산했지만 기술제공은 끝내지 않아 기아가 자사의 오토바이를 기아 혼다(KIA Honda)라는 브랜드로 판매하기도 했다. 1981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기아기연이 대림그룹에 인수되자 대림 혼다 (DAELIM Honda)로 바뀌게된다. 이 일화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혼다는 현재까지도 한국 시장에서 철수한 적이 없다. 오히려 혼다는 한국 시장에 토요타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4] 특히 이륜차 메이커 중에서는 일본 메이커 중 유일하게 한국에 공식 자회사 법인을 세운 회사가 혼다이다.
4. 어록
도전에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チャレンジして失敗することを恐れるより、何もしないことを恐れろ。)
나는 책 읽는 것이 싫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책에는 과거의 일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책을 읽고 있으면 왠지 그거에 사로잡혀 과거로 퇴보하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대체로 내 인생은 소위 보거나 듣거나 직접 해보거나 하는 식을 통해서 이래저래 해야 한다고 배워 왔다. 혹시 모르는 게 있어서 책을 읽는다면, 책을 읽는 대신 틈틈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僕は、本を読むのが嫌いだ。極端ないい方をすると、本というものは過去のものしか書いていない。僕は、本を読むと、それにとらわれてしまって、何だか退歩するような気がして仕方がない。大体、僕の人生は、いわゆる見たり、聞いたり、試したりで、それを総合して、こうあるべきだということで進んできた。もしわからないことがあって、そのために本を読むんだったら、そのヒマに人に聞くことにしている。)
내게 성공은 오직 되풀이되는 실패와 그 실패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의 99%를 실패하는 일에 쓴다. 사실 성공과 평범함의 차이는 아주 근소하다. 일을 99%까지 마무리 했을지라도 성공의 열쇠인 1%를 더하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하고 만다.
멸사봉공(滅私奉公), 즉 자신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이미 낡은 구상입니다. 여러분들이 혼다에 입사한 이상 회사를 위해 일한다거나 상사를 위해 일한다는 낡은 사고방식은 모두 깨끗하게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일하면 됩니다. 각자가 자신을 위해 일하고 그런 일에 즐거움을 느낄 때, 우리 회사도 성장하고 모두가 함께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살면서 지금까지 수 많은 실패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 실패로 지금의 혼다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1]
또는 몸을 쓰는 일터의 작업조 두목. 한국 공사판에서도 간간히 들을 수 있다.
[2]
일본에서 덴노라는 존재는 패전 뒤 반백년이 지난 현대에도 쉽게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다. 그렇다 보니 진보 성향의 언론 매체도 '덴노 헤이카(천황 폐하)'라고 깍듯이 존칭을 써 줄 정도. 현재는 일본인들도 그냥 덴노라고 부르는 사람도 늘어났지만, 여전히 일본의 주요 언론 보도는 '덴노 헤이카'라고 깍듯이 존칭을 붙이고, 심지어 덴노의 거동에까지 높임말을 쓴다. 예외가 아사히 신문으로, 아사히 신문은 '덴노 헤이카'라는 경칭은 써도 그 거동에까지는 높임말을 쓰지 않는다.
[3]
기아가 1975년 세운 이륜자동차 부문
[4]
당장 혼다 한국법인의 최대 밥줄이
혼다 PCX &
혼다 커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