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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롯데 마린즈 2025 시즌 코칭스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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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cccccc,#323232> '''<1군> 21 요시이 마사토 [[감독#s-1.1| ★ ]] · 71
타테야마 요시노리 76 에무라 나오야 · 77 쿠리하라 켄타 80 오츠카 아키라 · 81 이시미네 쇼타 84 쿠로키 토모히로 · 87 네모토 슌이치 88 카네코 마코토 · 90 미츠야마 히데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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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72 미키 료 · 73 카나자와 타케시 · 75 호리 코이치 77 구리하라 켄타 · 78 오토나리 켄지 79 마츠나가 타카히로 · 82 호소야 케이 83 모로즈미 켄지 · 85 미나미 마사키 86 사부로 [[감독#s-1.1| ★ ]] · 89
오카 토모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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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디네이터> 후쿠우라 카즈야 · 오타니 토모히사 · 코사카 마코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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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틀:치바 롯데 마린즈로 돌아가기 | ||
다른 NPB 팀 명단 보기 |
2005 퍼시픽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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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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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1919><colcolor=#ffffff> 치바 롯데 마린즈 No.75 | |
호리 코이치 堀幸一 | Koichi Ho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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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9년 4월 2일 ([age(1969-04-02)]세) |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카이세이 고등학교 |
신체 | 182cm / 85kg |
포지션 | 내, 외야 유틸리티( 2루수)[1]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7년 NPB 신인 드래프트 3순위 |
소속팀 | 롯데 오리온즈/치바 롯데 마린즈 (1988~2010) |
지도자 |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타격코치 (2013~2017)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타격코치·육성담당 (2018)[2]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내야 수비코치·주루코치 (2018)[3]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타격코치 (2019~2020) 치바 롯데 마린즈 육성군 종합·타격코치 (2021)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타격코치 (2022~) |
해설위원 | 닛폰 방송, J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1~2012) |
등장곡 | Propaganda - p: Machinery |
응원가 | popeye the sailor[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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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치바 롯데 마린즈 소속의 야구선수이자 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코치.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카이세이 고교시절 1987년에 좌익수로 첫 봄 고시엔 출전했으나 1차전 만에 강탈하였고. 이 후 여름 고시엔 현 예선 준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나가사키 상업고교에 패배하고 말았다.199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 오리온즈에 3순위로 지명 받으며 입단하게된다.
2.2.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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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개막초부터 1군엔트리에 들어오며, 4월 14일 긴테쓰 버팔로즈전에서 프로 데뷔 첫 안타를 쳐냈다. 이후 2루수로 21경기를 선발 출전했다.
1991년 등번호를 5번으로 변경했다. 이 시즌에는 주전 2루수로 뛰면서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하였고, 홈런 20개를 기록하면서 4번타자를 맡았는데 이때 '연봉이 12구단중에서 가장 싼 4번 타자'라고 평가받았다.
1995년 2루수에서 유격수로 전환하여 타순을 3번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 3할을 기록했으며 팀의 10년만에 A클래스 달성에 공헌을 하였다.
1997년 신인 코사카 마코토의 등장으로 2년만에 주전 유격수자리를 넘겨주고 2루수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해 코사카는 신인 한시즌 최다도루 기록인 56 도루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하게 되었다.
1998년 훌리오 프랑코가 3년만에 재입단을하면서 주전 2루수자리도 1년만에 넘겨주고 외야로 포지션을 바꾸게되었다. 이 해 호리는 통산으로 1번부터 9번까지 전타순 홈런을 달성했다.
1999년 주전 2루수였던 훌리오 프랑코가 팀의 리빌딩의 이유로 퇴단하면서 다시 2루로 돌아왔지만, 부진과 부상이 동시에 겹치며 안좋은 활약은 보였고. 이듬해 이후에는 수비력이 좋은 사카이 다다하루가 우선적으로 기용되게 되면서 2001년까지 외야수로 뛰게되었다.
2003년 시즌 22홈런 78타점을 기록하면서 팀의 주력 선수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타순은 주로 3번이나 6번이 많았지만, 후반기에는 4번을 맡으며 전타순 선발 출전을 달성했다.
2005년 시즌 종료 직전 규정타석에 도달하면서 1996년 이후 9년만에 3할을 달성하였고. 이 해 프로데뷔 18년만에 퍼시픽 리그 2루수부문에서 베스트 나인을 수상하면서[6] 팀의 31년만의 리그우승과 일본시리즈우승에 공헌을 하였다.
2006년부터는 컨디션 하락과 고령으로인해 선발 출장보단 대타자원으로의 출전이 더 많아졌다.
2007년 7월 7일에 시즌 1호 홈런을 날리며 아리토 미치요가 가지고 있던 18연속 홈런을 경신하는 19년 연속 홈런을 기록하였다. 수비에서는 아오노 타케시의 부상과 이마에 토시아키의 부진으로 인해, 오랜만에 3루수로 선발 출전했지만 호세 오티즈가 입단 하면서 다시 대타자원으로 밀리게 되었다.
2009년 호세 오티즈와 홀리오 즐레타 가 모두 퇴단하면서 경기에 출전할 기회가 늘어났다. 호리도 2할 중반대의 타율과 4홈런을 기록했으며 대타로 출전시 타율이 무려 .417를 기록하였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는 호리에게 코치직을 권유했으나 호리는 현역의지를 드러내며 현역을 선택했다.
2010년 2군에서 타율 .333, 1홈런 OPS .806을 기록하면서 좋은 성적을 남겼지만 결국 시즌이 끝날때까지 1군 출전기회는 없었고. 9월 11일 구단으로부터 전력외 통보와 프런트직을 권유 받았으나 호리는 현역의지를 드러내며 프런트직을 거절하고 시즌 종료후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참여하여 5타수 2안타 1홈런을 기록했지만 타 구단으로 부터 오퍼는 없었다. 결국 12월 2일 현역은퇴를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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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도자 경력
2013년부터 치바롯데에서 1군 타격코치를 2017년까지 맡았지만, 2017년 팀 타율, 득점 , 안타 모두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였고 팀도 6년만에 리그 꼴찌를 기록했다.2018년 부터는 2군 타격코치 겸 육성담당으로 전환되었다가 5월 10일 2군 내야 수비,주루코치로 바뀌었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다시 2군 타격코치를 맡았다.
2021년 육성군 코치로 갔다가 2022년부터 2군 타격코치를 맡고있다.
신기하게도 1군 타격코치로는 엄청나게 욕을 먹었지만 2군 타격코치로는 호평을 받으며 평판이 정반대이다. 물론 은퇴 후에는 1군 타격코치를 하다가 너무 못 해서 2군 타격코치로 강등된 거라서 경험이 쌓여서 2군에서는 성과를 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4. 플레이 스타일
이른 시기부터 '천재'라고 불렸으며, 독특한 오픈 스탠스에서 느긋하게 스텝하는 타격폼으로 공을 잡아 놓고 친다. 우투 상대로한 타격 능력은 바비 발렌타인감독에게서 퍼시픽리그제일 이라고 평가되어, 주자가 있을시 특히 더 발휘되었다고 한다. 또한 4번을 치기에 적합한 장타력도 가지고 있다고한다.수비에서는 안정감이 넘치는 2루수비와, 외야 와 내야 전포지션을 소화할수 있을 정도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서 오랜 세월 팀을 지탱했다.
5. 여담
- 입단 당시 프로에서 처음 맞이한 캠프에서 팀 선배 오오무라 이와오와 사토 유키히코의 타격실력에 압도되어 자신감을 상실했다고 하며, 친가의 부모님도 3년도 버티지 못할거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세월이 흘러 오오무라와 사토는 주전 정착에 실패한 채 백업을 떠돌다 각각 2003, 2004년을 끝으로 은퇴한 반면, 호리는 3년차부터 일찍 주전으로 자리잡아 팀의 강타자로 꾸준히 활약하고 현역 말년에 일본시리즈 제패와 베스트나인 수상까지 이뤄내는 경사도 누리면서 마지막 승자가 되었다.
- 2009년 7월 5일 경기에서 선발 3루수로 출장했음에도 첫 타석 이후 바로 교체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수석코치였던 니시무라 노리후미가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알려준 선발 멤버를 들을 때 주전 3루수였던 이마에 토시아키의 애칭인 고리와 호리 코이치의 성씨인 호리를 잘못 알아들어 실수한 것이었다. 결국 호리는 첫 타석 이후 다음 이닝 때 이마에와 교체되었다.
- 낚시를 매우 좋아하며. 팀 동료 쿠로키 토모히로와 함께 낚시 기행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 오피셜 베이스볼 가이드 2010에서 이름을 堀幸一가 아닌 塀幸一로 오타가 난적이있었다. 성씨 첫 글자가 저 글자인 팀 후배 헤이우치 히사오[7]가 간혹 堀로 오타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드믈게 반대의 사례가 되었다.
-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롯데에서 처음 감독을 맡았을 당시 호리를 메이저리그로 데려가고 싶은 선수로 뽑았다. 실제로 호리가 FA가 되었을 당시 발렌타인 감독이 지휘하던 뉴욕 메츠에서 오퍼가 있었다고 하나 결국 무산되었다.
[1]
통산 출전 기록을 보면 2루수로만 1287경기를 출전했으며, 이외에도 외야수로 239경기, 유격수로 219경기, 3루수로 128경기, 1루수로 46경기를 출전했다. 신인 때부터 1994년까지는 여러 포지션을 오가긴 했으나 대부분 2루수를 봤고, 1995~1996년에는 유격수, 1998년과 2001년에는 외야수를 많이 봤으나 이외에는 대부분 2루수를 봤다. 말년에 1루수로 나온 정도.
[2]
~5월 9일
[3]
5월 10일~
[4]
(演奏)オイ!(×3) (演奏)オイ! オイ! オイオイ! かっ飛ばせ! 幸一!(어이! ×3 어이! 어이! 어이어이! 날려버려! 코이치!)
[5]
2010년 MVP의 강제해산 후에도 유일하게 물갈이를 안당하고 살아남은 응원가다. 2010년에 1군으로 올라온적이 없어서 부른건 은퇴식이 마지막이지만..
[6]
퍼시픽리그 최고령 첫 수상으로 기록되었다.
[7]
1981년생 내야수로
미키 료 이전 롯데의 내야 유틸리티 백업 1순위였던 선수. 하지만 임팩트있는 실책을 계속 저질러서 분명 내야 수비 유틸리티인데도 수비 못한다는 밈이 돌던(...) 선수였다. 2014년을 끝으로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