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6투멘 지도 |
2. 역사
15세기 후반 다얀 칸은 다이온타슨다이 칸 사후 혼란스웠던 몽골을 다시 안정시키고, 투멘[1]을 새로 조직한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이 6투멘으로 할하 투멘도 이 때 만들어졌다. 할하 투멘은 다얀 칸의 두 아들이 지배했다. 다얀칸 시기 할하는 12개의 오톡[2]이 있었다. 게레센제가 7오톡을, 알추볼드가 5오톡을 지배했다. 전자를 외할하, 후자를 내할하라고 한다. 7오톡은 잘라이르, 베수트, 엘지긴, 고를로스, 후후이드, 하트긴, 우량카이 등이 있었고, 5오톡은 바린, 바유트, 자루드, 우지예트, 옹기라트 등이 있었다.내할하 알추볼드의 아들 호르가치 하사르는 차하르의 구덴 칸을 따라 시라무렌강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차하르와 함께 요동을 자주 공격했다. 그중에서 우지예트의 쇼한 조릭투 홍바투르가 제일 심했다. 쇼한 조릭투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출전한 이여송이 오히려 패하고 사로잡혀 죽었다. 이후 후금이 강성해지자, 바유트의 엉거더르가 누르하치에게 쿤둘런 한[3]이라는 존호를 바치기도 한다. 이후 내할하는 후금에게 복속되기도, 싸우기도 하다가 결국 홍타이지 시기에 이르면 완전히 복속된다.
반면 게레센제의 외할하는 계속 할하강에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7개였던 오톡이 13개로 늘어났다.[4] 게레센제 사후 그의 일곱 아들이 13개의 오톡을 나눠 차지했다. 할하는 적극적으로 영역을 넓혔다. 할하가 영역을 크게 넓힐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 따라줬기 때문이었다. 4투멘[5]이 명나라 근처에 있었고, 우량카이 투멘은 반란을 일으키고 실패해 해체된 상태였다. 사실상 고비사막 이북의 초원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게레센제의 후손이었던 아바타이[6]와 라이후루[7]는 튀메드의 알탄 칸과 함께 오이라트를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그렇게 셀렝게강 근처에 있던 오이라트는 차츰 서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튀메드와 할하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이들은 알타이 산맥을 넘어 준가리아로 내쫓기게 된다. 그리고 아바타이는 자신의 아들 수바가타이로 하여금 오이라트를 감시하게 되었다. 즉, 할하는 아바타이와 라이후루, 알탄 칸의 협력으로 할하강 근처에서 준가리아까지 영토를 넓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바타이 사후, 오이라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수바가타이를 살해했다. 라이후루가 곧 다시 오이라트를 복속시키고, 자신의 사촌형제였던 숄로이 우바시에게 감시를 맡겼다.
아바타이는 후흐호트를 방문해 달라이 라마 3세를 접견했다.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은 아바타이는 곧 자신의 부족들에게 티베트 불교를 믿을 것을 지시했다. 이 때부터 몽골에서 샤머니즘이 점차 사라지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난다. 1585년 아바타이는 달라이 라마 3세를 다시 접견하고, 그에게서 투시예트 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아바타이는 자신을 따라 열심히 오이라트를 정벌했던 라이후루에게도 칸의 직위를 내려줄 것을 부탁했다. 달라이 라마 3세는 라이후루에게도 칸의 칭호를 내려줬으니, 바로 자삭투 칸이었다. 아바타이와 라이후루가 거느리던 부족은 이 칭호를 그대로 부족의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투시예트칸부가 있던 몽골 초원 동쪽을 할하 좌익, 자삭투칸부가 있던 몽골 초원 서쪽을 할하 우익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7세기 초반에 차하르의 링단 칸이 몽골 통합 전쟁을 시작했다. 링단 칸은 명나라로부터 받은 경제적 지원으로 손쉽게 튀메드, 융셰부, 오르도스를 복속시켰다. 할하는 차하르에 복속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대부분의 할하 유력자들은 링단 칸에게 항복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 중 유일하게 링단 칸에 복속할 것을 주장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튀멩켄 촉투 홍타이지였다. 그가 링단 칸을 지지했던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은 카르마파를 믿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할하 유력자들의 압력을 받은 그는 후흐노르로 이동한다. 촉투 홍타이지는 후흐노르에 있던 튀메드 부족들을 쫓아내고, 그곳을 근거로 삼아 한창 내전 중[8]이었던 티베트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아슬란을 보내 겔룩파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슬란은 티베트 정권을 장악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통치에 실패해 후퇴하고 만다. 그리고 후퇴하던 도중 부하에 의해 살해된다. 촉투 홍타이지는 후금 홍타이지의 빈집털이로 갈 곳을 잃고 헤매던 링단 칸에게 자신이 있는 암도 지방으로 올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링단 칸은 이동 중 천연두로 사망하고 만다. 카르마파에 대한 우위를 가지기 위해 티베트 겔룩파는 티베트 불교를 막 받아들인 오이라트의 호쇼트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호쇼트부 수장 토로바이쿠는 이를 수락했고, 곧바로 암도 지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촉투 홍타이지 세력을 쫓아낸다.
청나라가 차하르, 튀메드, 오르도스, 융셰부를 모두 복속시키는 와중에도 할하는 여전히 독립을 유지중이었다. 할하는 오이라트의 후신 준가르와 맹약을 맺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좋게 유지하는 등 나름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하 좌익과 우익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면서 일이 점점 복잡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할하 우익의 칸의 자리를 두고 내분이 일어나자 수많은 우익 사람들이 좌익으로 피난을 갔다. 이후 어느정도 안정이 되자 할하 우익은 좌익에게 부족민들의 반환을 요구하지만 좌익은 이를 무시한다. 이 때문에 둘 사이에 점차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다. 준가르는 이를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이 문제에 개입한다. 그런데 당시 준가르의 지도자였던 갈단의 동생이 할하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준가르는 이를 빌미로 할하를 공격한다. 이에 할하는 청나라의 강희제에게 복속을 대가로 보호를 요청했다. 이렇게 할하 또한 청나라의 영토가 되고 이번원의 관리를 받게 된다. 할하는 이전에 복속된 몽골에 비해 늦게 청나라에 복속되어 있었고, 더 바깥쪽에 있었기 때문에 외몽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3. 기타
청나라에서는 몽골을 외몽골과 내몽골로 나누어 구분하였다. 내몽골은 홍타이지 시기 때 복속한 몽골을, 외몽골은 강희제 시기 때 복속한 몽골을 가리켰다. 이 때 복속한 외몽골은 대부분 할하에 속했기 때문에 사실상 외몽골과 할하는 1900년대 전까지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청나라는 모든 몽골족을 맹과 기라는 조직으로 나누고, 각각 유목할 땅을 지정하여 몽골족이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을 막았다. 그 결과, 1900년대에 이르면 외몽골 지역과 내몽골 지역 사이에 묘한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는 이후 외몽골이 내몽골을 통합하는데 실패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1]
칭기즈칸 시기 사람 수를 단위로 만들었던 행정조직. 한국, 중국에서는
만호라고 불렀다.
[2]
투멘 밑의 조직단위였다. 다얀 칸 시절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밍간(천호)를 대체했다.
[3]
존경스러운 칸이라는 뜻이다
[4]
우네게드, 케루드, 후리예 호로, 초오호르, 탕구트, 사르툴 등 6개의 오톡이 새로 등장했다.
[5]
차하르, 튀메드, 오르도스, 융셰부
[6]
게레센제의 손자
[7]
게레센제의 증손
[8]
카르마파와 겔룩파 사이의 내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