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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수/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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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국무총리 한승수의 일생을 정리한 문서.

2. 일생

1936년 12월 28일 강원도 춘천군(現 춘천시) 서면 방동리 박사마을에서 아버지 한석린(韓錫麟, 1910. 8. 28 ~ 1995. 8. 17)과 어머니 진천 송씨(鎭川 宋氏, 1910. 11. 6 ~ 1959. 9. 13)[1]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55년 춘천고등학교(27회), 1960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2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 1968년 7월 영국 요크 대학교 대학원(University of York)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 등을 각각 취득했다.

석사 학위 취득 후 1963년 7월 5일부터 1967년 4월 19일까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임시 조교로 재직했다. 그 사이 1965년 영국으로 유학해 요크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 과정에서 수학하면서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Research Fellow) 및 경제학과 보조강사(Assistant Lecturer)를 역임했고, 당시 국제경제학 강의를 맡았다. 1968년 7월 박사 학위 취득 후부터 1970년까지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엠마누엘 컬리지 응용경제학과에서 연구관(Research Officer)을 역임하면서 경제학 강의를 담당하기도 했다.[2] 이후 귀국해 1970년 10월부터 1971년 4월까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시간강사 출강했고, 1971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해 1988년까지 역임했다. 그 사이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 교환교수,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일본 도쿄대학 교양학부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재무분과 외환담당 위원으로 정치에 처음 참여했고, 상공부 무역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했다. 1988년 4월 26일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강원도 춘천시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어 초선 의원을 역임했다. 이후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에서 1988년 12월 5일부터 1990년 3월 19일까지 상공부장관을 역임하였고, 임기가 끝난 뒤에는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 잠시 교편을 다시 잡았다.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통일국민당 손승덕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1993년 3월 제15대 주아메리카합중국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면서 다시 교단을 떠나게 되었고, 1994년 12월까지 주미대사직을 역임했다. 1994년 12월부터 1995년 12월까지는 대통령비서실장 역임했고, 1996년 8월부터 1997년 3월까지 부총리 재정경제원장관 역임했다.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 후보로 강원도 춘천시 갑 선거구에 출마해 국회 재입성에 성공하지만,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이회창의 공천 물갈이에 밀려 낙천했다. 이에 김윤환, 이수성, 조순 등 낙천 인사와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했고, 한승수는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본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강원도 춘천시 선거구에 출마했다. 이때 현직 국회의원이던 한나라당 류종수 후보, 강원도지사 노동부장관 출신의 새천년민주당 이상룡 후보 등 총 5명의 후보가 난립한 끝에 득표 2위를 기록한 한나라당 류종수 후보를 628표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가 소속한 민주국민당은 킹메이커(김윤환), 전직 총리(이수성), 전직 서울시장(조순) 등이 뭉쳤다는 점에서 선전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결과는 처참했다. 김윤환, 이수성 등은 모두 낙선하고 지역구에서는 한승수, 전국구에서는 강숙자가 유일한 당선자였다.

당시 총선에서 여당 새천년민주당의 단독 과반확보에 실패 김대중 정부 자유민주연합, 민주국민당과 연립내각을 꾸림에 따라 2001년 3월 26일부터 2002년 2월 4일까지 제30대 외교통상부장관 맡았다. 2001년 9월부터 2002년 9월까지 한국인 최초로 1년간 제56차 UN총회 의장을 맡기도 했고, 또한 2001년 4월 1일 외교통상부차관을 퇴직한 뒤 낭인신세로 있던 반기문을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기용하였다.[3] 2002년 2월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민주국민당을 탈당하였다가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던 자신의 공언과는 달리 이후 다시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 #

2004년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한 이후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역임하였다.[4] 이후 2004년 6월부터 2008년 2월까지 김·장 법률사무소 고문을 역임했고, 이명박 정부에서 2008년 2월 29일부터 2009년 9월 28일까지 제39대 국무총리 역임하였다.

2009년 9월 29일 정운찬 국무총리로 교체된 뒤 2009년 10월 김·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복귀했고, 2010년 5월에는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 이사회 초대 의장에 내정되었다. 2016년 6월부터 2022년 6월까지는 제8대 유한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했다. 2022년 10월 20일 유엔 총회의장협의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1] 송순원(宋淳元)의 딸이다. [2] 2008년 국무총리 임용 당시 허위경력 논란이 있었다. 이전에는 1965년 7월부터 1968년 9월까지 요크 대학교 경제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제경제학을 강의했고,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엠마누엘 컬리지 응용경제학과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경제학 가르쳤다고 말했었다. [3] 노신영 전 국무총리와 한승수 전 국무총리가 반기문 멘토로 잘 알려져 있다. [4] 하지만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러시아에 물을 쳐먹으면서 당시 2011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대구광역시에 유치하는 데에 성공한 김범일 대구광역시장과 비교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친이계답게 김범일이 인천국제공항선 KTX 드립을 가장 먼저 치면서 사기를 쳐놨기 때문이다. 결국 KTX는 이명박이 밀어 붙였던 호남고속철도 개통과 동시에 2018 평창 동계올림픽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때까지 잠깐이나마 인천국제공항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