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루돌프 뢰싱(Hans-Rudolf Rösing : 1905년 9월 28일~2004년 12월 16일)
1. 개요
나치독일의 군인.2.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940. 2. 13)1급 철십자 훈장 (1940. 7. 3)
기사 철십자훈장 (1940. 8. 26)
이탈리아 왕국 검십자훈장 (Croce di guerra al valor militare : 1941. 11. 1)
이탈리아 왕국 왕관훈장 (Ordine della Corona d'Italia : 1941. 11. 1)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십자장 (1966. 3. 8)
3. 약력
전간기에 킬 군항에 있는 무르뷕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고속정장으로 복무하다가 2차 대전 중에는 유보트 함장으로 2형 유보트인 U-11과 U-10, 7형 유보트인 U-36, U-48을 지휘했었다. 특히 U-48로 초계 임무를 나가는 동안 61,000톤의 적함을 가라앉혀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 이후에는 지휘 임무에 전념했다. 나치 독일이 패전하고 서독 해군이 재건되자 간부로 다시 들어간 그는 소장까지 진급하고 서독 정부로부터 대공로십자장을 수여받았다.4. 해군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
평생을 뱃사람으로 보낸 한스-루돌프 뢰싱은 출생부터가 바다와 해군에 깊은 관련이 있었다. 1905년 9월 28일에 독일 제국의 군항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에서 1차 대전 당시 해군 제독을 지낸 아버지 베른하르트 뢰싱(Bernhard Gustav Rösing : 1869~1947)과 어머니 엘프리데 뷘셰(Elfriede Wünsche : 1882~1961) 슬하의 5남매 중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한스에게는 빌헬름 뢰싱(Wilhelm Rösing)과 쿠르트-볼프 뢰싱(Kurt-Wolf Rösing),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붙인 베른하르트 뢰싱,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을 딴 막내딸 엘프리데 뢰싱이란 여동생이 있었고 훗날 아들들은 모두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1차 대전에서 장갑순양함 샤른호르스트(SMS Scharnhorst)와 쾨니히급 전함 크론프린츠(SMS Kronprinz)를 지휘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해군 장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자라온 그는 19세가 되던 1924년 3월 31일에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장래 해군 장교의 재목으로 특별히 고르고 골라 뽑은 "1924년 동기" 중 하나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4월 4일부터 발트 해의 항구 슈트랄준트(Stralsund)에 마련된 항해 2국으로 보내져 4년 6개월 동안이나 기초 군사훈련부터 시작해 항해 훈련까지 받게 된다. 1928년 9월 27일에 뢰싱은 브라운슈바이크급 전함 엘자스(SMS Elsass)로 승함했고, 이때는 중위 3호봉이 되어 있었다.
5. 바이마르 해군 시절
이처럼 뢰싱의 해군 생활은 독일이 조약에 의해 군대가 해체된 후인 1924년 3월에 이미 시작되었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함상 훈련과 원양 항해 연습까지 모두 수료한 후, 전노급 전함 엘자스를 탄 그는 곧 경순양함 님페(SMS Nymphe)와 당시 최신예 순양함인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에서 근무했다. 그는 1930년에서 1931년에 걸쳐 비밀리에 외국에 파견되어 잠수함 탑승 경험을 쌓은 몇 안되는 해군 장교 중 하나였는데, 두말할 나위 없이 장래 독일 해군이 확장할 때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이것은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잠수함의 보유를 엄격히 금지 당한 독일로서는 잠수함 탑승 경험을 축적하는 유일한 길이었다.6. 2차 대전
뢰싱은 2년을 S 보트라 불리는 S-15와 S-3 고속정장으로 근무한 끝에, 1933년 10월에 잠수함 방위 학교(U-Boot-Abwehrschule)로 전속했다. 그가 처음 잠수함 근무를 시작한 것은 1935년 9월에 신예 유보트인 U-11을 타면서부였다. 2년간 연안 잠수함을 지휘한 그는 1937년 초에 U-35로 갈아타고 아조레스 제도 방면으로 정찰을 나갔다. 같은 해 10월에는 크릭스마리네의 병기 시험장이 있는 에케른푀르데(Eckernförde)에서 1년 동안 어뢰 실험과 개발에 참여했다.1938년 12월에 소령이 된 한스-루돌프 뢰싱은 제5잠수함대를 지휘하하는 명령을 받았다. 나중에 개전된 후인 1940년 1월에 그는 제7잠수함대까지 함께 지휘하면서 유보트 함대 사령관(Befehlshaber der Unterseeboote) 대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기, 병에 걸려 출동하기 어려워진 헤르베르트 슐체(Herbert Schultze) 대위 대신 U-48의 함장이 되기도 했다. 뢰싱은 이 함으로 55일 동안 2회의 초계 임무를 나갔고, 두 번째 항해에서 귀환한 후에 기사 철십자훈장을 받게 되었다.
1940년 9월에서 1941년 2월까지 뢰싱 소령은 독일 해군과 이탈리아 해군의 연락 장교로 프랑스의 보르도에 부임했다. 연락장교라곤 해도, 이탈리아 해군 수뇌부는 뢰싱 같은 잠수함 전문가를 단순한 연락장교로 썩히기는 아까왔던 탓에, 아예 이탈리아 잠수함에 태워 그에게 잠수함 운용과 전술에 대하여 지도받기도 했다. 같은 해 3월부터 8월까지 수 개월 동안 유보트 함대 사령관 참모 생활을 하다가 다시 제3잠수함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7월에 서부 잠수함대 지휘관(Führer der U-Boote)에 취임했는데 이 자리는 생나제르, 라로셸, 로리앙 같은 프랑스 서부 해안에 배치된 모든 유보트를 책임지는 막중한 보직이었다.
7. 논란
U-415의 함장을 지낸 헤르베르트 베르너(Herbert A. Werner : 1929~2013)는 전후인 1969년에 독일과 미국에서 동시에 펴낸 자서전 "철의 관(Die Eisernen Särge)"에서 크릭스마리네의 잠수함 부대에 관한 처우와 전쟁 당시 내렸던 명령에 관해 설명하는 단락에서 뢰싱에 관해 언급했었다. 당시 캐나다에서 사업을 하며 지내던 베르너는 이 회고록을 통해 유보트 부대를 미화하고 잠수함 승조원들을 신화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르너는 그의 책에서 1944년 여름 프랑스 북부에 주둔한 제1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있던 뢰싱은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하자 "해협 명령 1호(Order Kanal Nr. 1)"라는 제목이 붙여진 다음과 같은 지령서를 하달했다고 기술했다."상륙에 투입되는 적 전차 1대는 100명의 무장 병력이 뭍에 오르는 것과 맞먹는다. 그러므로 대서양 연안에 전차가 상륙하는 사태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한다. 모든 잠수함장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심지어 자신의 함정을 잃을 위험에 처하더라도 상륙함 공격을 우선하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적의 상륙함대에 접근할 때 얕은 물이나 기뢰로 차단된 해역, 적에게 노출되는 사태 같은 위험은 고려하지 말아야만 한다... (중략) 모든 함장들은 더 심각하고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임무를 맡게 된 것이며, 조국 독일은 귀관들에게 가장 힘든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 논란은 이른바 돌격 명령(Rammbefehl)으로 알려지며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특전 유보트의 원작자 로타르 귄터 부크하임(Lothar-Günther Buchheim) 같은 유보트 승선 경험자도 훗날 자신의 배를 희생하도록 요청한 해협 명령 1호를 읽었다고 주장하며 헤르베르트 베르너에게 공감을 했다. 그렇지만 위르겐 로베(Jürgen Rohwer)가 베르너의 책을 출판할 때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이 그 진술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유보트 함장이나 승무원 출신이었던 다른 증언자들은 그 명령서에는 기뢰를 피하여 전투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복귀하라고 쓰여있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베르너는 전쟁 후기에 함장이 되었고 변변한 전과도 없었던 데다, U-415를 좌초시켜 배를 잃은 책임이 있는 함장임을 지적하며 증언의 신빙성에 관해 이의가 제기되었고, 출판사 대표인 로베도 뢰싱이 평소 보인 행동으로 보았을 때 그런 난폭한 명령을 하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2001년에 이 주제에 관해 논문을 쓰던 24세의 대학생 라스 보덴슈타인(Lars Bodenstein)과 가진 인터뷰에서 뢰싱은 자신이 내린 명령은 그런 내요이 아니었으나, 일선 잠수함장들이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에 대하여 배제하지 않았다. 역사가 디에터 하르트빅(Klaus Dieter Hartwig)은 이 명령을 가미카제 작전으로 간주하며, 이에 상응하는 처벌이 불가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연합군의 상륙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출동한 유보트 30척 중에서 20척은 돌아오지 못한 탓에, 이 논란은 결론이 난 상태는 아니다.
한스-루돌프 뢰싱은 1944년 가을에는 노르웨이로 옮겨 프랑스에서와 같은 보직을 유임했고, 독일이 항복한 후에는 1년 이상 연합군 정보부대에 의해 독일의 잠수함 전술과 운용 체계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면서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47년 초에 풀려나고 보니, 그와 함께 해군 장교로 복무했던 형제들은 모두 죽고 막내아들인 자신만 살아남았다.
8. 기타 활동
그는 종전 후에도 서독에서 오랜 시간 동안 선장으로 일했던 탓에 독일 해운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또한 요트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독일 해양스포츠 협회(Deutscher Hochseesportverband HANSA) 최초의 일원 3명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슬루프인 바펜 폰 함부르크(Wapen von Hamburg)를 엘베 강에서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엘바 섬에 있는 협회의 요트학교로 끌고 간 후, 거기서 교장으로 생활하기도 했다.뢰싱이 96세가 된 2001년에 세바스티안 덴하르트(Sebastian Dehnhardt)[1]과 기자 겸 작가인 귀도 크노프(Guido Knopp)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세기의 전쟁 : 죽음에 이르는 함정(Der Jahrhundertkrieg : Tödliche Falle)에서 시대의 증인으로 출연하기도 했었다. 그밖에도 학구적인 해운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던 뢰싱은 영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출판된 선박과 해운 산업에 관한 원서들을 번역하는 작업으로도 잘 알려져 델리우스 클라징 출판사(Delius Klasing Verlag)와 에디숑 마리팀(Edition Maritim) 출판사와도 긴밀하게 협조하며 일했었다. 그 외에도 <워터 스포츠 소책자(Das Buch kleine vom Wassersport)>나 <우리 시대의 전술(Kriegskunst in unserer Zeit)> 같은 군사 저술도 남겼다.
[1]
영화 스탈린그라드(1993)의 각본가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