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안드레올리의 감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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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7대, 8대 |
이름 |
프랑코 안드레올리 (Franco Andreoli) |
생년월일 | 1915년 12월 2일 |
사망년월일 | 2009년 2월 5일 (향년 93세) |
국적 | 스위스 |
출신지 | 루가노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조건 | 미상 |
소속팀 | FC 루가노 (1935-1947) |
국가대표 | 13경기 (1939-1946) |
감독 | 스위스 대표팀 (1949-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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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위스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안드레올리는 여러 클럽의 유스팀을 거쳐 1935년 11월부터 FC 루가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루가노는 1937-38 시즌에 팀 역사상 최초로 스위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안드레올리와 아마도 등이 활약해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를 승점 1점차로 따돌릴 수 있었다.
루가노는 1940-41 시즌에 두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그 이후에 안드레올리가 은퇴하던 1947년까지 3번의 준우승을 더 추가했다.
2.1.2. 국가대표
안드레올리는 1939년 11월에 스위스 대표팀에 데뷔했는데 당시 스위스 대표팀의 센터 하프백 자리에는 유럽 정상급의 하프백 시리오 베르나티가 있었다. 그러나 이날 스위스는 1938년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를 3:1로 깨버렸고 안드레올리가 기회를 잡게 되었다. 오히려 베르나티가 한동안 대표팀 선발 명단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1940년 3월에 스위스 대표팀은 토리노로 원정을 가서 이탈리아와 1:1 무승부를 기록해 4달 전의 결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안드레올리가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라 스위스 대표팀의 상대가 될 수 있는 팀은 적었다. 당시 스위스 국민들은 대표팀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시합을 갖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41년 4월 20일, 스위스는 베른에서 독일과 친선 경기를 가졌고 2:1로 승리했다.
전쟁이 끝나고 안드레올리는 스위스 대표팀에서 4경기를 더 뛰었다.
2.2. 감독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스위스를 본선에 올려놓은 전략가 카를 라판이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자 스위스 대표팀은 안드레올리와 미넬리, 실런의 3인 감독 체제로 돌아갔다.그러나 월드컵 본선에서 스위스 대표팀은 안드레올리 감독 체제로 돌아갔다. 힘든 여정 끝에 브라질에 도착한 스위스는 다소 자만했던 브라질과 2:2 무승부를 거뒀다. 하지만 브라질이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잡으면서 멕시코와의 경기 결과에 관계 없이 스위스는 탈락이 확정되었다.
여행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마드리드에 들른 다음
다카르에 들렀다가 비행기를 벌레로부터 소독하기 위해
페르남부쿠에 12시간을 머물죠. 마지막으로 춤과 음악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히우의 호텔에 있다보니 우리는
벨루오리존치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제대로 상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우리는 월드컵에서 승리했습니다.
프랑코 안드레올리. 195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까지의 교통편을 회상하며.
프랑코 안드레올리. 195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까지의 교통편을 회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