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라우로 아마도 (Lauro Amadò) |
생년월일 | 1912년 3월 3일 |
사망년월일 | 1971년 6월 6일 (향년 59세) |
국적 | 스위스 |
출신지 | 루가노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
신체조건 | 170cm | 61kg |
소속팀 |
FC 루가노 (1930-1932) 세르베트 FC (1932-1934) FC 루가노 (1934-1940)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40-1949) |
국가대표 | 54경기 20골[1] (1935-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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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위스의 전 축구 선수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아마도의 데뷔 시즌인 1930-31 시즌에 FC 루가노가 스위스 컵 우승을 차지했다. 1932년부터 그는 2시즌을 세르베트 FC에서 뛰었는데 세르베트는 그가 있던 2시즌간 모두 나티오날리가 우승팀이 되었다.1934년, 다시 루가노에 돌아온 아마도는 복귀 시즌에 리그 23골로 득점 2위에 올랐고 루가노에서 6시즌을 보냈다.
1940년, 아마도는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로 팀을 옮겼다. 그라스호퍼는 1938년 월드컵 당시 스위스 대표팀 감독이었던 카를 라판이 감독으로 있던 팀이었고 프레디 비켈과 호흡을 맞추며 9시즌간 리그 3회 우승, 컵 대회 4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그는 두 차례 리그 득점왕도 되었고 1942-43 시즌은 팀의 더블과 함께 득점왕까지 한번에 나온 최고의 한 해였다.
아마도는 1949년에 축구계에서 은퇴했다.
2.1.2. 국가대표
1935년 1월 27일, 아마도는 독일을 상대로 처음 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스위스는 에드문트 코넨에게 해트 트릭을 내준 끝에 0대4로 패했다.1938년 5월 1일에 열린 1938년 월드컵 지역 예선 포르투갈전. 스위스는 전반 29분에 터진 아마도의 쐐기골로 포르투갈을 2대1로 꺾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5월 21일에는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를 상대로 스위스 대표팀이 역사상 첫 승리를 거뒀는데 아마도는 이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잉글랜드의 왼쪽 진영을 효과적으로 공략해서 2대1로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월드컵 본선에서 스위스는 독일을 꺾고 8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독일과의 두 차례 승부에서 스위스는 조르주 에비와 주장 세베리노 미넬리를 잃었고 8강에서 헝가리에 0대2로 패했다.
이후 아마도는 1945년 11월 11일, 이탈리아를 상대로 해트 트릭[3]을 기록해서 4대4 무승부를 이끌기도 했고 1948년 5월 17일의 스코틀랜드전에서 스위스가 2대1 승리했을 때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아마도는 1948년 12월 5일, 아일랜드에 스위스가 1대0으로 이긴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 경력을 마무리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득점력이 뛰어났고 곡예같은 패스와 크로스로 유명한 윙어였다.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 나티오날리가 우승 5회: 1932-33, 1933-34(이상 FC 세르베트), 1937-38( FC 루가노), 1941-42, 1942-43(이상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나티오날리가 A 우승 1회: 1944-45(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 컵 우승 5회: 1930-31(FC 루가노), 1940-41, 1941-42, 1942-43, 1944-45(이상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 컵 준우승 2회: 1933-34(FC 세르베트), 1948-49(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4.1.2. 개인
- 나티오날리가 득점왕 2회: 1942-43, 1946-47(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