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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0:29:29

폭탄삼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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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내용3. 반응4. 조작5. 기타6. 출처

1. 개요

폭탄삼용사(爆弾三勇士)는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일본 육군 공병 3명이 돌격로를 개척하기 위해 자진해서 중국 국민혁명군의 진지로 용감히 달려들어 철조망을 폭파하고 산화했다고 알려진 영웅담을 지칭한다. 육탄삼용사(肉弾三勇士)라고도 한다.

2. 내용

폭탄삼용사의 주인공은 일본 육군 독립공병 제18대대에 소속된 에시타 타케지(江下武二) 일등병, 키타가와 스스무(北川丞) 일등병, 사쿠에 이노스케(作江伊之助) 일등병을 말한다.

1932년 2월 22일에 일본 육군 독립공병 18대대는 국민혁명군 19로군에 맞서면서 19로군이 상하이 교외(현 상하이시 바오산구)에 구축한 토치카 철조망 등으로 구축한 방어선을 뚫기 위해 철조망을 파괴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정석대로라면 철조망까지 다가간 다음 폭약을 점화해야 했지만, 점화하는 사이에 중국 국민혁명군의 사격에 맞기 일쑤였기에 일본군은 자기네 진지에서 미리 폭약에 점화한 다음 돌격해서 철조망을 폭파하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이 작전에는 36명이 지원하였고, 그 중 폭탄삼용사의 3명이 선발되었다. 그들은 폭약을 들고 국민혁명군 진지에 돌진했으나 3명 중 한 명이 국민혁명군의 총탄에 맞아 지체되었다. 이대로라면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었는데, 이들은 폭발에 휩쓸릴 각오를 하고 철조망까지 돌격하여 철조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폭발에 휩쓸려 모두 사망했다. 죽기 전에 이들은 ' 제국 만세', ' 천황 폐하 만세'를 단말마처럼 외쳤다고 한다.

3. 반응

이 영웅담은 일본 전역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를 최초(2월 24일)로 보도한 아사히 신문은 이들에게 육탄삼용사(肉弾三勇士)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영웅으로 찬양했다. 이후 일본 육군성 아라키 사다오 대신은 2월 25일에 이들을 폭탄삼용사(爆弾三勇士)라 명명하였고, 당사자 3명에 대해 2계급 특진을 통해 육군 오장으로 특진시켰다. 이들에 대한 동상도 세워졌으며 영화도 만들어졌고 육군 최초로 조의금이 모였다.

폭탄 3용사는 순식간에 국민 영웅이 되어 온 만화, 이야기, 광고 등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파일:폭탄 3용사.jpg 파일:폭탄 3용사.png
폭탄 3용사의 동상 폭탄 3용사가 나오는 맥주 광고

동명의 군가도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는데 오사카매일신문과 도쿄일일신문의 공모로 만들어졌다. 작사는 요사노 뎃칸(与謝野寛), 작곡은 쓰지 준지(辻順治).

4. 조작

그러나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군국주의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이 이뤄지면서, 당시 참전했던 일본군 병사의 증언을 토대로 이들이 부풀려진 가짜 전쟁 영웅에 불과하다는 설이 계속 제기되었다. 충분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지만 폭탄의 기술 문제로 인해 일찍 폭발하여 폭사해버린 사고사였다는 것이다.
파일:KakaoTalk_20240429_1600451861.jpg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현대사> 1권에 나온 관련 내용

또한 실제로는 폭탄삼용사의 3명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군 공병 약 35명도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서 비슷한 작전을 벌였는데, 이들은 모두 살아 돌아왔다. 저 3명만 죽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

폭탄삼용사를 최초로 보도한 아사히 신문은 이후 2019년 10월 13일에 정정보도를 냈다. 당시 아사히 신문은 ‘3용사’의 실체는 현장에 가지도 않은 당시 특파원들이 전선에서 돌아온 장교의 얘기만 듣고 꾸며낸 미담이었다고 설명했다.

5. 기타

1949년 당시 개성 송악산에서 조선인민군 토치카에 자폭 공격한 한국군 병사 10명을 이르는 육탄 10용사는 당시 한국군 상층부가 이들의 활약을 구 일본 육군의 폭탄삼용사(육탄 3용사)에 빗댄 것에서 유래한다.

6.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