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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생제르맹 FC/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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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생제르맹 FC 역대 시즌
~2009 시즌 이전 2009-10 시즌 2010-11 시즌

1. 개요2. 1980년대 이전3. 1990년대4. 2000년대5. 2010년대, 무한의 오일 머니6. 2020년대

[clearfix]

1. 개요

파리 생제르맹 FC의 역사에 관한 문서이다.

2. 1980년대 이전

1960년대 후반, 당시 프랑스 파리를 연고지로 둔 축구 클럽은 1896년에 창단된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라는 종합 스포츠클럽[1] 레드 스타 FC, 스타드 프랑스 등이 있었다.

그런데 '라싱 파리'가 1969년 리그를 탈퇴하게 되며 프로축구 부문에서 완전 철수를 계획하는 일이 벌어지고, 다른 클럽들도 강등이나 클럽 해체 등등의 이유로 파리가 연고지인 1부 리그 소속 클럽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는 상황이 왔다.

이런 상황에 수도인 파리에 '빅클럽'을 만들어야 한다는 많은 여론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먼저 파리 FC가 창단이 되었고, 다음 해인 1970년, 스타드 생제르맹과 파리 FC가 병합을 발표하고 약 2만 명의 서명을 얻은 뒤에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파리 생제르맹 FC 이다.[2] 창단 당시에는 장폴 벨몽도 등 파리 출신의 유명인들과 기업들이 자금 지원과 많은 응원을 보내왔지만, 출발이 그닥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선 전신 클럽이 파리가 연고지였고, 파리 FC와 병합을 함에도 PSG의 연고지는 파리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의 파리 외곽인 생 제르맹 앙 레[3]를 연고지로 한 것. 당시 파리 시와 15k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때문에 또다시 1부 리그 소속 클럽이 없어진 파리시는 PSG에 대한 기업들의 자금 원조를 막았으며, 결국 1970-71 시즌 2부 리그 우승으로 1부 리그에 속할 예정이었던 PSG는 아마추어 클럽(당시 프랑스 3부 리그인 디비시옹3에 소속되었다.)으로 이름을 유지한 채 떨어져나왔고, 파리 FC는 예정대로 리그 1에 남아 2개의 클럽으로 다시 나뉘어졌다.

3부 리그에 소속되었으나, 파리 시민 2만여 명의 서명까지 받으며 창단되었다고 상술했듯이 파리지앵들의 선택을 받은 건 파리 FC가 아니라 이미 PSG였다. ## PSG는 파리의 사교계 유명인들까지 등에 업고 급성장 하였으며, 1973-74 시즌 이후에 다시 리그 1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정작 그 해 리그 1에 남았던 파리 FC는 2부로 강등되었다. 파리 FC가 강등당하면서 1974년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파르크 데 프랭스는 PSG의 홈구장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 PSG는 생 제르맹 앙 레가 파리에 속하게 되며 이제 파리시에게 홀대받을 이유조차 없어졌고, 1970년대 말까지 리그 1에서 버티며 클럽의 토대를 닦았다.

대한민국 국내에선 PSG도 강등당한 적이 있다며, 상술한 1972-73 시즌의 디비시옹 3 소속을 근거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강등(Relegate)'이 아닌 '재소속(Restart)'의 개념으로 보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창단 이후 한 번도 강등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Which European football clubs have never been relegated? :: 더 가디언, 단 한 번도 강등당하지 않은 유럽의 축구 클럽들은?
A brief history of PSG :: ESPN, 간단한 PSG 역사

한편 파리 FC는 강등 이후 리그 1 강등권과 리그 2에서 전전하다가 1983년, 전술한 '라싱 파리'와 병합/분할되어 프랑스 4부 리그까지 강등당한다. 분할된 팀 중 하나는 5부까지 강등되었다. 2019-2020 시즌 기준, 파리 FC는 현재 2부 리그 2 소속이다. 근데 승강팀이고 작년까지만 해도 프랑스 3부 리그 샹피오나 나시오날에 속했었다.

1978년에 취임한 프랑시스 보렐리 회장에 의해 클럽은 빠르게 성장하여 루이스 페르난데스, 도미니크 바라테이, 도미니크 로슈토 등을 축으로 1981-82 시즌에 쿠프 드 프랑스 결승에 올라 우여곡절 끝에 클럽 역사상 최초의 주요대회[4] 우승을 하게된다. 1982-83 시즌에도 대회 2연패 달성.

1985-86 시즌에는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취임하고 AJ 오세르로부터 조엘 바츠를 영입하여 창단 16년 만에 팀 역사상 최초로 리그 1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5] 그리고 90년대가 되자 파리의 본격적인 첫번째 전성기가 시작된다.

3. 1990년대

1991년 5월에 카날+ 방송사가 클럽을 인수한 뒤, 공격적인 투자로 강팀이 되어 1992-93 시즌 UEFA 컵과 1993-94 시즌 UEFA 컵 위너스 컵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잡고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특히 1994년에 파리는 통산 두 번째 리그 1 우승을 달성하였는데, 파리의 최대 라이벌인 마르세유는 전 시즌에 벌인 승부 조작을 들키게 되고, 파리에 밀려 우승을 놓친것도 서러울 지경인데 전 시즌 리그 1 우승 타이틀 박탈이라는 중징계와 함께 강등을 당하게 되어서 파리 입장에선 겹경사를 치렀다.

그렇게 리그에서 걸리적거리던 라이벌을 제거한 파리는 대망의 1994-95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시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조지 웨아, 히카르두 고메스, 하이, 다비드 지놀라, 폴 르갱, 앙투안 콩부아레, 알랑 로슈, 뱅상 게랑, 다니엘 브라보, 베르나르 라마 등등 주축 선수들이 뛰어난 호흡을 보여주며 PSG는 8년 전 첫 출전 때와는 180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PSG는 16강 조별리그에서 같은 조였던 FC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홈, 원정 안 가리고 모두 이겼고, 뮌헨전 2승을 포함하여 러시아의 강호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우크라이나의 강호 FC 디나모 키예프를 상대로도 2승씩 거두며 도합 6전 전승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8강에 진출, FC 바르셀로나까지 쓸어버리며 팀 역사상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진출이라는 업적을 달성하였다. 현재에 들어 레바뮌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낼정도로 유럽의 삼대장이라 불릴만한 팀들이 90년대엔 모두 파리에게 스윕당했다는점이 흥미롭다.

비록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준결승전에선 밀란에게 완패를 당했지만, UEFA컵, 컵위너스컵, 챔피언스 리그에서 연속으로 준결승 진출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1996, 1997년에는 2연속 컵 위너스 컵 결승 진출에 힘입어[6] UEFA 공인 클럽 랭킹 1위를 차지했다.[7]

그러나 1998년에 미셀 데니소트 회장이 떠난 뒤 팀은 ​재정과 성적면에서 하락세로 접어드는 국면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팀을 주름잡던 스타 선수들은 하나둘씩 떠났고, 빚은 1억2200만 유로로 뛰어올랐다.[8]

4. 2000년대

2000년대 내내 쿠프 드 프랑스에선 세 번이나 우승컵을 들어 올렸지만, 정작 리그에서는 이름값에 걸맞은 포스를 보이지 못했다.

2000-01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에서 니콜라 아넬카가 이적, 2001년에는 브라질 클럽으로부터 호나우지뉴를 영입한다. 호나우지뉴는 2003년까지 팀에 있었는데 주요 출신 선수 부분에 후술된 바와 같이 각종 문제로 3000만 유로라는 생각보다 싼 값에 FC 바르셀로나로 가게 된다.

호나우지뉴가 떠난 2003년, 1,200만 유로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이전의 PSG 최고의 공격수였다고 회자되는 파울레타를 영입한다. 파울레타는 2008년까지 다른 클럽의 러브콜에도 PSG에 남아 리그 1 득점왕 2회를 차지하며 좋은 활약을 해준다. 물론 그의 마지막 시즌인 2008년엔 16위[9]로 강등권을 아슬아슬하게 탈출하는 등 좋지 않았지만, PSG에게 좋은 추억이 많은 대회인 쿠프 드 프랑스 2회 우승, 쿠프 드 라 리그 1회 우승을 달성하였다. PSG의 클럽 통산 100득점 또한 파울레타가 달성하였다.

한편 파울레타의 활약에도 불구, 망하기 직전 같던 구단 재정은 카날+가 2006년에 2,600만 유로라는 싼 값으로 콜로니 캐피털(부동산 투자회사), 버틀러 캐피털 파트너스(개인투자회사), 모건 스탠리에 주식을 매각하면서 해결했다.

이후 카날+가 손을 뗀 뒤 PSG는 심각한 재정난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에미레이트 항공이 메인 스폰서가 되었고, 파울레타가 떠나는 2008년에 스폰서 계약을 2014년까지 갱신하였다.

팀 에이스는 떠나고 구단주는 공석에 메인 스폰서는 새로 구하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 시즌 리그 16위라는 성적표를 들고 2008-09 시즌을 맞이한 PSG는 리그 초중반까지는 우승경쟁을 했지만 6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챔스 진출권도 놓치며 아쉬운 마무리를 하였다. 그래도 강등 걱정 안 한 게 위안이라면 위안. 이때쯤 카날+가 주식을 매각했던 회사 중 하나인 콜로니 캐피털이 모건 스탠리로부터 PSG 주식 보유분의 95%를 구입하며 구단주가 되었다.

2009-10 시즌엔 또 쿠프 드 프랑스에서 8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 시즌의 FA컵 우승은 PSG의 여자축구단인 PSG 페미닌도 동시에 이룬 것이라 의미가 크다. 동일 클럽의 남녀팀이 쿠프 드 프랑스를 동시에 석권한 것은 프랑스 최초였기 때문.

트로피는 몇 개 들었지만 리그 등 근 10년간 그저 그런 성적을 낸 팀은 2010-11 시즌을 기점으로 반등에 성공했다. 클로드 마켈렐레 그레고리 쿠페, 루도빅 지울리 같은 노장 선수들을 참 잘 활용하면서 마마두 사코, 클레망 샹톰과 같은 재능 있는 유스 출신 선수들도 동시에 1군으로 올라와서 주전 확보를 하였으며, 특히 AS 모나코에서 이적해 온 안데르손 네네의 사기적인 활약이 부흥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2010-11 시즌 네네가 윙어 자리에서 엄청난 활약을 뽐내던 전반기의 PSG는 거의 우승 후보 1순위급 경기력을 선보였다. 다만 스쿼드 뎁스가 얇은 관계로 후반기에 들어 거의 전 경기 풀타임을 뛰던 네네의 과부하로 인하여 팀 전체의 경기력도 현저히 감소하여 끝내 4위로 추락했다.

5. 2010년대, 무한의 오일 머니

2011년 5월,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가 카타르 투자청(QIA)의 자회사인 카타르 스포츠 인베스트먼트(QSI)를 통해 돈을 투자하여 전 구단주인 미국 콜로니 캐피탈로부터 PSG 지분의 70%를 소유하고, 대주주 겸 PSG의 구단주가 된다. 카타르의 인수 뒤에는 PSG의 서포터이자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사르코지의 설득이 있었다. 동시에 카타르 정부 소유의 beIN 스포츠가 리그앙 중계권을 획득했다.

파리 생제르맹은 순식간에 엄청난 재력을 확보하였고[10], 실제로 그 재력을 유감없이 쏟아붓고 있다. 알 타니가 QSI를 통해 PSG에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은 600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로 밝혀져 EPL 리얼부와 함께 쇼 미 더 머니를 현실에서 시전 가능한 구단이 되었다.

2012년엔 콜로니 캐피털과 버틀러 캐피털 파트너스로부터 남은 30%의 주식까지 완전히 구입, QSI가 단독주주가 되었다. 카타르의 타밈 황태자(2013년 6월 25일 이후 카타르 수장)의 친구인 나세르 알 켈라이피가 회장을 맡게 되었고, 동시에 수년간 1억 유로 이상의 금액을 팀 강화를 위해 이적시장에 쓰겠음을 시사했다.

2011-12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대형 슈퍼 스타들을 영입하기 시작, 2012-13 시즌을 전후로 화려한 전력을 구성했다. 공격진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에세키엘 라베찌, 제레미 메네즈, 하비에르 파스토레, 안데르손 네네, 중원에 제2의 피를로라 불리는 마르코 베라티, 이탈리아 국가 대표 중앙 미드필더 티아구 모타, 마티유 보드메, 블레즈 마튀이디, 모하메드 시소코, 그리고 수비진에 막스웰, 치아구 시우바, 알레스, 크리스토프 잘레[11], 마마두 사코 등이 포진했다.

네임 밸류만 따지자면 어느 빅 리그에서든 우승에 도전해볼 수 있으며, 챔스도 4강 정도는 족히 노려볼 만한 수준으로 팀이 탈바꿈되었다. 다만 한꺼번에 폭풍 영입을 해댄지라 조직력이 바닥을 기었고, 그 때문에 한동안 공격은 즐라탄, 수비는 시리구가 다 하는 상황이 이어지기도 했다.

한때 레오나르두 단장이 레알 마드리드 카카 영입에도 공을 들이고 있었지만, 카카가 끝내 마드리드에서 큰 활약을 보이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점쳐질 뿐더러 주급도 어마어마한 수준인지라 결국 영입을 포기했다. 카카 본인도 마드리드를 떠난다면 다른 곳은 거의 생각치 않고 자신의 친정 클럽인 AC 밀란만을 원하는 상황이었다. [12]

한편, PSG는 인테르의 전 감독이자 세리에 짬밥이 꽤 있는 레오나르두 단장의 취향 때문인지 세리에 A 출신 선수들을 많이 노리는 편인데, 콰밥만훈 이후로 또 다른 대괄호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마우로 사라테,[13] 유벤투스 아마우리,[14] 쩌리엘로란 별명을 가진 AS 로마 마르코 보리엘로 영입을 노린다는 기사가 나오자, 세리에매니아 같은 세리에 관련 커뮤니티들에게 '잉여들을 수거해 주시는 레오님'으로서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다 옛말이 되었고, 현재 한국의 세리에 커뮤니티들의 일반적인 여론은 레오나르두와 PSG를 매우 싫어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AC 밀란의 에이스 센터백이자 현 유럽 최고의 센터백들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치아구 시우바를 한화 620억에 달하는 거액에 영입해 갔고, AC 밀란을 먹여살렸던 '세리에 킹'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약 320억 가량에 영입해 갔으며, 나폴리의 그 유명한 '삼각 편대'의 일원인 에세키엘 라베시까지[15] 데려가면서 쩌리 수거자는커녕 에이스 수집자로서 세리에를 말려 죽이려 든다고 신나게 까는 중. 다만 PSG가 무슨 세리에에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며 그저 단장이 레오나르두에 감독이 안첼로티라서 세리에 위주로 선수를 수급했던 것뿐이다.

6. 2020년대

2018-19 시즌부터 감독으로 부임한 토마스 투헬 감독을 따라 그럭저럭 순항중이었고, 특히나 2019-20 시즌에는 나가는 대회마다 전부 우승을 차지하는 독보적인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의 트레블을 막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무르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16] 특히 2020-21 시즌의 경우 토마스 투헬 감독의 까다로운 성격이 레오나르두 단장과의 불화로 이어졌고 특히 PSG 답지 않은 이적시장에서의 움직임으로 인해 초반 성적 부진을 겪게 되었고, 2021년 12월 투헬 감독을 경질하고 새 감독으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를 데려오게 되었다.

결국 2020-21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4강에 머무르고, 리그에서는 준우승에 머무르면서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내게 되었고, 결국 2021-22 시즌을 앞두고 그야말로 분노의 영입을 하면서 네이마르-음바페-메시라는 그 어느 팀도 이룰 수 없는 현존 최강의 3톱 공격라인을 구축하였고, 하키미와 라모스의 영입으로 수비에서의 전력 강화, 이탈리아의 유로 우승을 이끌었던 돈나룸마 골키퍼 영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골키퍼를 두 명이나 팀에 두는 무지막지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화려한 3톱 공격진에 비해 너무나 미약해보이는 중원 라인의 부재, 그리고 센터백을 충분히 메꾸어줄 선수로 영입했던 라모스의 부상, 이름값 화려한 스타 선수들을 전혀 휘어 잡지 못하는 포체티노의 카리스마와 선수들의 장점을 전혀 끌어내지 못하는 전술력의 부재 등으로 인해서 팀은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비록 리그 우승은 다시 되찾았지만, 컵대회 16강 조기 탈락과 챔피언스 리그 16강 조기 탈락이라는 성적표를 안고 말았다.

다만 음바페와 3년 재계약에 성공하였고, 레오나르두 단장과 포체티노 감독이 경질되며 그 후임으로 루이스 캄포스[17] 크리스토프 갈티에가 선임됨에 따라 이후 팀이 어떻게 꾸려 나갈지 여부에 따라서 PSG가 다시금 비상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음바페 원맨팀으로 남아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될지 여부가 달려있을 것으로 보인다.

리그에선 2021-22, 2022-23, 2023-24시즌까지 3시즌 연속 우승했지만 챔피언스리그는 여전히 우승이 멀다. 같이 약체급에서 돈많은 아랍인 구단주를 만나 강호로 달라진 맨체스터 시티가 2022-23 챔피언스리그를 비롯하여 트리플 우승을 거두면서 첼시, 맨시티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린 거랑 달리 파리는 여전히 그런 건 없다. 갈티에 감독 후임인 루이스 엔리케 감독 체제에서도 마찬가지.

그 후 2024-25 시즌, PSG에 얼굴과도 같던 킬리안 음바페가 여름 이적시장때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에이스들[18]이 임대와 완전이적으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1] 클럽 자체는 1882년 창단되었지만 프로축구 부문에 손을 댄 건 1896년 부터 이다. 산하 프로축구 구단만을 칭할 땐 프랑스어 발음으로 '라싱 파리'라고 불렸다. [2] 소규모 구단들의 연합체로 시작된 AS 로마의 창단 형태와 비슷하다. [3] 1978년 프랑스 지방행정 개편이 있기 전이라 레지옹 일드프랑스 파리가 아니었다. [4] 2부 리그는 주요대회가 아니라서... [5] 다만 그 시즌 파리의 첫 유러피언컵에선 체코슬로바키아 MFK 비트코비체에게 패배하면서 1라운드 만에 탈락하고 만다. [6] 1996년 우승, 1997년 준우승. [7]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19위(!), 유벤투스가 2위. [8] 이후 2006년 카날+가 콜로니 캐피털, 버틀러 캐피털 파트너스, 모건 스탠리에 각각 지분을 매각하면서 재정 문제는 겨우 해결했다. [9] 2006-07 시즌엔 15위였다... [10] 카타르는 매장된 석유도 상당하지만 가스 자원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더 엄청나다. [11] 네임 밸류가 달리는 점 때문에 저평가되는 대표적인 선수로 프랑스 축구 전문가들은 잘레도 프랑스 국대에 충분히 뽑힐 만한 실력이라고 다들 말한다. 실제로 블랑이 프랑스 국가 대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새로이 국가 대표 감독으로 선임된 디디에 데샹은 바로 잘레를 국가 대표로 선발했다. 이후에도 바카리 사냐, 마티외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국대 오른쪽 풀백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며, 파리를 떠나 리옹으로 간 14-15 시즌부터는 31살 나이에 폼이 더욱 올라와서 국대 주전으로도 간혹 나왔다. 드뷔시와 사냐가 각각 부상과 폼 저하로 고생하다 보니 더 많은 기회를 받았다. [12] PSG에게 주급이 무슨 상관이냐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실 PSG는 즐라탄을 제외하고서는 주급을 그리 비싸게 주면서 데리고 있는 선수가 없다. 이적료는 어마어마한 오버 페이였던 하비에르 파스토레조차도 연봉은 세후 470만 유로 정도로 한화로는 67억 원 가량이다. 주급으로 환산하면 1억 4천만 원 정도. 첼시로 이적했어도 이 정도는 받고도 남을 수준의 급여이다. 그런데 파스토레보다 잘할 거라는 기대치 자체가 줄어들어 버린 카카에게 거의 준 4억에 달하는 막대한 주급을 줄 정도로 PSG가 카카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13] 거액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SS 라치오로 이적한 이후, 사태웅이라 불리울 정도의 극도로 이기적인 플레이에 저조한 득점력으로 라치오의 응원 단장이란 비아냥이나 들었으며 인테르로 임대 가서도 전반기에만 잠깐 반짝하고 그대로 후반기를 말아먹은 선수다. QPR 시절 아델 타랍을 생각하면 된다. [14] 주급을 자그마치 한화 2억 5천이나 받으면서 최전방 공격수 포지션에서 뛰는 주제에 2년간 5골도 못 넣은 그야말로 주급 도적. [15] 다른 두 명은 에딘손 카바니, 마렉 함식. [16] 더구나 파리가 챔스 우승을 했다면 리그 1 두 번째 챔스 우승(첫 번째는 라이벌인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은 물론, 리그 1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하는 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쓰라린 패배였다. [17] 고문 자격으로 단장 역할을 하는 중이다 [18] 마누엘 우가르테, 카를로스 솔레르, 노르디 무키엘레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