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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01:34:25

티페르눔 전투


삼니움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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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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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297년, 로마군이 삼니움군의 매복 공격을 격퇴한 전투.

2. 배경

기원전 304년 제2차 삼니움 전쟁을 종결한 로마 공화국은 삼니움족에 지원 병력을 보내고 로마에 반기를 든 헤르니키족을 지원한 아이퀴족을 공격해 상당한 영토를 확보하고 식민도시를 장악하는 등 세력을 지속적으로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에트루리아 연맹은 기원전 299년 로마가 자신들의 영역 가까이에 있는 나니아 시를 새로 건설하자 이제는 자기들 차례라고 여기고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갈리아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침략하자,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들에게 "돈을 줄 테니 우리와 함께 로마를 공격하자"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에트루리아를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받겠지만 로마와 싸울 의사는 없다고 답했고,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돌려보냈다.

로마 원로원은 첩보원들을 통해 에트루리아의 이같은 움직임을 전해듣고 에트루리아와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아드리아해 연안에 살면서 북쪽의 갈리아계 민족인 세노네스족, 서쪽의 에트루리아에 압박을 받고 있던 피센테스족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제안했고, 피센테스족은 중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로마와 손잡으면 이로울 점이 많다고 여겨 받아들였다. 이후 보결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1]가 로마군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서 여러 마을을 약탈했지만, 에트루리아인들은 전투를 거부하고 성채에 틀어박혔다.

한편, 제2차 삼니움 전쟁에서 로마에게 패배한 뒤 평화 협약을 맺었던 삼니움인들은 로마가 세력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에트루리아인처럼 언젠가 저들에게 병합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들은 로마의 위협으로부터 힘을 기르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의 루카니아인들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루카니아인들이 동맹을 거절하자, 로마가 에트루리아에 전력을 쏟느라 자기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틈을 타 루카니아를 빠르게 공략하여 세력을 키우기로 했다. 기원전 298년, 삼니움족의 침략으로 많은 도시와 마을을 빼앗긴 루카니아인들이 로마에 사절을 보내 로마와 동맹을 맺겠으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로마는 루카니아인들의 곤경에 연민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라 삼니움인들이 루카니아를 병합한다면 강력한 힘을 갖출 것을 두려워했기에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로마 사절이 삼니움으로 찾아와서 루카니아 침공을 중단하라고 요구하자, 삼니움인들은 "로마는 주변 국가들을 마음대로 칠 수 있는데 우리는 왜 그럴 수 없는가?"라고 반발하며 사절을 위협해 돌려보냈다. 이에 로마는 삼니움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는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 테베레강 북쪽의 에트루리아 도시 및 촌락들을 황폐화했고,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는 삼니움으로 쳐들어가 보비아눔과 아우피덴나를 공략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바르바투스가 테베레강 북쪽의 에트루리아 도시 및 촌락들을 파괴했다는 건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켄투말루스가 삼니움 연맹을 구성한 4개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페트리 족의 수도인 보비아눔을 전쟁 첫해에 공략했다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한다. 다만 켄투말루스가 로마와 전쟁할 준비가 덜 되어 싸우기를 회피한 삼니움족 덕분에 여러 마을과 촌락들을 순조롭게 약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97년, 로마 시내에 에트루리아인과 삼니움인이 거대한 군대를 일으켜 로마를 향한 합동 공세를 개시할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로마인들은 제2차 삼니움 전쟁 당시 맹활약한 명장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를 만장일치로 집정관에 세우려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으며, 단독 집정관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308년 동료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세워주겠다는 제안을 받자 그제야 받아들였다. 그 후 룰리아누스가 에트루리아로 가서 바르바투스의 군대를 인계받는 동안, 무스는 삼니움 전선으로 가서 켄투말루스의 군대를 인계받았다.

그러던 중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에트루리아 남쪽 도시들인 수트리움, 팔레리, 네피의 사절들이 로마에 찾아와서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이 로마에 평화 협약을 호소하기 위한 사절을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원로원은 룰리아누스에게 에트루리아에서 삼니움으로 이동해 무스와 연합하여 삼니움족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룰리아누스는 지시에 따라 남하했지만, 삼니움족은 그가 무스와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25,000명 가량의 병력을 극비리에 파견했다.

3. 경과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삼니움 장군은 로마군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고 지휘관 역시 수많은 승리를 거둘 정도로 지휘력이 탁월한 만큼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겼다. 그 대신, 적이 방심한 채 남하하고 있을 때 산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급습해 큰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이에 따라 마테세 산맥의 티페르눔 마을 인근 계곡에 매복한 채 룰리아누스의 로마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삼니움족이 매복에 능하다는 것을 지난 전쟁을 통해 확실히 파악하고 있던 룰리아누스는 티페르눔 계곡의 지형이 매복 공격에 적합한 것을 보고 적이 숨어있을 수 있다고 판단해 정탐 능력이 뛰어난 정찰병들을 파견해 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게 했다. 정찰병들이 돌아와서 적이 숨어있다고 보고하자, 룰리아누스는 적의 작전을 역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직 집정관이며 현재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고 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다른 산길을 통해 적의 배후로 돌아가게 했다. 이후 적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강행군하다가 계곡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각형 방진을 결성한 뒤 계곡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삼니움인들은 적이 매복을 눈치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다고 보고 전 병력을 동원해 로마군을 사방에서 에워싸서 공격했다. 사전에 강력한 방진을 갖춘 로마군은 결연히 맞섰지만, 삼니움족이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악착같이 몰아붙이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룰리아누스는 적의 중앙 대열을 돌파하기 위해 후방에 대기중이던 정예병들을 투입했다. 이들은 한동안 훌륭한 검술을 발휘해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삼니움족이 전열을 유지한 채 맞대응하자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 때, 바르바투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삼니움족 후방의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삼니움족은 이들이 또다른 로마군 집정관 무스의 군단이라고 오판하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도주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3,400명을 사살하고 830명을 생포했으며, 23개의 군기를 확보했다. 한편, 무스는 티페르눔에서 수백 km 떨어진 말벤툼에서 삼니움족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아풀리아인들을 말벤툼에서 격파했다.

룰리아누스는 티페르눔에서 매복한 삼니움족을 격퇴한 뒤 무스와 합류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4개월 동안 삼니움족의 여러 마을과 농지를 파괴했지만, 삼니움족이 전투에 불응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캄파니아의 겨울 숙영지로 귀환했다. 그 사이, 삼니움족은 에트루리아와 동맹을 맺고 갈리아인을 끌어들여 로마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하고 에트루리아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제의했다.
[1] 원래는 집정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가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승마 사고로 사망했기에 코르부스가 대신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