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렌제 계곡 전투 Schlacht im Tollensetal 독일어 Battle of the Tollense Valley 영어 |
|||||
연대 | 기원전 1200년대 | ||||
장소 |
독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메클렌부르크호수고원 톨렌제 계곡 |
||||
원인 | 미상 | ||||
결과 | 미상 | ||||
교전자 | |||||
청동기 시대 토착민 언필드 문화권 추정 |
동부에서 온 이주민 루사티아 문화권 혹은 중부/동부 유럽인 |
||||
지휘관 및 병력 | |||||
알 수 없음 | 알 수 없음 | ||||
피해 규모 | |||||
알 수 없음 |
알 수 없음 |
Schlachtfeld im Tollensetal 독일어
Tollense valley battlefield 영어
[clearfix]
1. 개요
톨렌제 계곡의 위치 |
2. 발견 및 발굴
1996년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발견한 위팔뼈 |
1996년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톨렌제강 강둑에서 우연히 부싯돌 화살촉이 박힌 사람의 위팔뼈[1]를 발견하였고, 이를 계기로 벌어진 사전조사에서 여러 인간과 동물의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2007년부터 체계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유골뿐만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여러 무기들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골들은 로스토크 대학교 등에서 분석되었다.
3. 발굴 결과
계곡에서는 인간의 유해뿐만 아니라 몽둥이, 화살촉 등의 다양한 무기와 말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유골은 대부분 20~40대의 젊은 남성과 몇몇 여성 및 어린이의 것들로 밝혀졌다.[2]유골들은 대부분 무기로 인한 치명적인 외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처가 치유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전투의 전 과정이 하루 남짓한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또한 25% 가량의 유해에서는 전투 이전에 입은 다른 상처의 치유 흔적이 발견되어 전투에 반복적으로 투입된 전사 계급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전투에서 창, 몽둥이, 도검류, 낫, 화살 등의 무기들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나, 청동제 무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투가 끝난 뒤 귀한 금속제 무기들을 수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약 750명에서 1,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통상적인 사상률(20~25%)을 적용하면 양측의 전투원은 총 3,000~5,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록이나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 지역에 천여 명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 체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소에 대한 조사 결과 기원전 13세기경 해당 장소에는 잘 정비된 가도 혹은 다리가 있었으며, 이들 시설은 전투보다 5세기 정도 이전에 건설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해당 지역 근방에 다리와 가도를 이용하던 상당 규모의 정착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4. 의의
이 유물의 발굴 이전까지 기존 학설로는 기원전 청동기 시대 시기의 중부유럽이 아직 간신히 농업과 목축업이 발흥하던 선사 시대였다는 설이 정설로 간주되었는데, 이 발굴로 인해 남유럽 이외에도 유럽에 기원전 시기로 소급되고 또 아무리 못해도 초기 도시국가 연맹 수준은 되는 정부의 통치를 받는 오래된 문명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3], 그 동안 청동기 시대 유럽에서 문명이 없었을 것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집었다.5. 기타
비슷한 시기 중근동 지역에서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과 히타이트가 격돌한 카데시 전투(기원전 1274년)가 벌어졌다.톨렌제 싸움터 유적을 통해 고대 중부유럽에 문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몇 년후에 발굴된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가 상당히 수준 높은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밝혀지자 이 유적이 재조명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