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토머스 드 그랜디슨 Thomas de Grandi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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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1375년 11월 1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그랜디슨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그랜디슨 | |
아버지 | 오토 그랜디슨 | |
어머니 | 베아트릭스 말레메인 | |
아내 | 카루의 마가렛 | |
직위 | 그랜디슨 남작, 가터 기사단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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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했다.2. 생애
제1대 그랜디슨 남작 윌리엄 그랜디슨의 막내 아들인 오토 그랜디슨과 베아트릭스 말레메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1369년 삼촌이자 제3대 그랜디슨 남작인 존 그랜디슨이 사망한 뒤 그랜디슨 남작위를 물려받았으며,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370년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6,000 원정군에 가담해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위협했지만, 수비대가 야전에 응하지 않고 철저히 농성하면서 공략에 실패했다.이후 겨울 숙영지를 어느 곳에 놓을지를 놓고 놀스와 대립했다. 놀스는 프랑스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브르타뉴 서부로 철수한 뒤 고지대에 숙영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랜디슨 등 다른 장군들은 척박한 브르타뉴 서부에서 약탈할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여기에 머물면서 주변 마을을 계속해서 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공격해오더라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놀스는 이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끝내 설득에 실패하자 2,0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 서부로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남은 4,000명은 3개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토머스 그랜디슨과 휴 칼블리의 이중 지휘를 받았고, 나머지 두 부대는 월터 피츠월터와 존 민스터워스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진군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12월 3일, 토머스 그랜디슨의 600~1200명은 퐁발랭에 주둔했고, 월터 피츠월터의 부대는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 있었다. 존 민스터워스의 부대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적이 멀리 분산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프랑스 무관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이 호기를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12월 3일 밤, 게클랭은 이틀 만에 160km를 주파하느라 지친 병사들을 독촉하여 야간 행군을 시작해 12월 4일 이른 아침에 퐁발랭에 도착했다. 토머스 그랜디슨의 잉글랜드군은 적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서둘러 전투 대형을 결성하려 했지만,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기도 적에 프랑스 중기병들이 달려들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화살 몇 발만 쏜 뒤 숲으로 도주했지만, 적의 맹추격으로 인해 대거 학살되었다. 그랜디슨의 부대는 샤토 드 라 페뉴 성벽 아래로 피신했다가 적이 쫓아오자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끝내 섬멸되었다. 퐁발랭 전투에서 살아남아 생포된 이는 이는 토머스 그랜디슨 외 몇몇 고위급 장교 뿐이었다. 이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그는 카루의 마가렛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고 1375년 11월 1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