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버트 놀스 Robert Knoll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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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25년경 ~ 1407년 8월 15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체셔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노퍽 스컬쇼프 | |
직위 |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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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했다.2. 생애
잉글랜드 왕국 체셔 출신으로 전해지며, 기록상에는 푸게레이, 그레벨, 샤토블랑 등 브르타뉴 전역의 여러 성의 수비대장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친척인 샤를 드 블루아에 맞서 싸우는 장 4세 드 브르타뉴를 따랐다. 1351년 30인의 결투에 참가했다가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355년 일디외섬의 고성을 공략했으며, 1356년 봄 흑태자 에드워드에 합세하기 위해 브르타뉴에에서 남하하는 그로스몬트의 헨리를 도왔다.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도중에 루아르 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브르타뉴로 철수했지만, 그는 분견대를 이끌고 동프홍 성을 공략했다.1356년 푸아티에 전투 이후, 그는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인 카를로스 2세에 고용되었다. 1358년, 1,000명의 잉글랜드-가스코뉴 부대를 이끌고 샤토뇌프를 점령하고 루아르 계곡 일대를 약탈했다. 그 후 루아르 강과 욘 강 사이의 소금 길을 따라 진군해 1358년 말에 말리코른 성을 공략했다. 얼마 후, 아르노 드 세르볼이 이끄는 2,000 프랑스군이 에티엔 마르셀의 반란과 자크리의 난에 직면한 샤를 왕자를 돕기 위해 북상하던 중 말리코른 성이 공략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곳을 되찾기로 했다. 주변 마을 주민들이 아르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놀스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격퇴했다. 결국 아르노는 말리코른 성 탈환을 포기하고 파리로 북상했다.
이후 놀스는 말리코른을 본거지로 삼고 주변 지역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또한 타네레엔푸이사예의 제철소로부터 파리로 가는 길목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그곳을 지나는 여행객들로부터 통행료를 뜯어냈다. 1359년 1월 오세르 공략에 착수했지만, 그곳을 지키는 용병 부대의 저항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말리코른으로 돌아와서 리그니르샤텔과 트루아의 나바라군 장수들과 힘을 합쳐 오세르를 공략하기로 했다. 한편 오세르 주민들은 놀스가 더이상 자신들을 노리지 않을 거라 여기고 용병대를 해산시켰다. 그 바람에 놀스와 나바라 장수들이 오세르를 다시 공격했을 때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결국 놀스는 오세르 공략에 성공했고, 1359년 3월 10일에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퀴세를 공략한 뒤 생프루세인을 포위했지만, 오베르뉴와 포레지앙 귀족들이 사병을 이끌고 반격해오자 철수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면서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고, 말리코른에 다 보관할 수 없어서 일부를 샤토뇌프에 보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민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잔인한 고문을 가했기에, 프랑스인들로부터 극도로 잔인하고 부도덕한 인물이라는 악평을 얻었다.
1359년 말, 프랑스 왕실 고위 관료인 로베르 드 파인즈가 그와 협상하기 위해 오세르를 찾아왔다. 이후 협상 결과, 놀스는 다량의 와인을 받는 대가로 와인과 기타 물품을 실은 배가 레젠느 수로를 무료로 통과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놀스가 점령한 영토는 그대로 가지는 게 혀용되었지만, 1년간 어떤 마을, 성, 요새도 추가로 점령하지 않고 적대행위를 벌이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1360년 10월 24일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이 브레티니 조약이 성립되었을 때, 놀스가 점령한 영토는 프랑스 왕국에 반환하기로 합의되었다.
당시 놀스는 오세르 주민들로부터 약탈을 모면하는 대가로 40,000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아직 그 돈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놀스가 몸값을 온전히 받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놀스는 이에 격노해 말리코른 마을과 성, 그리고 주변 지역에서 손이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한 뒤 그곳을 떠났다.
놀스는 브르타뉴로 돌아온 뒤 브르타뉴 공작이 되기 위해 항전 중인 장 4세 드 브르타뉴를 다시 도왔다. 1361년 메네트레올 공략에 성공했지만, 상세르 공략엔 실패했다. 1364년 9월 오레 전투에 참여해 장 4세와 대적하던 샤를 드 블루아를 전사시키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생포하는 데 기여했다. 1367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카스티야 원정에 참여했고, 나헤라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다. 1369년 아키텐에서 중병에 걸린 흑태자 에드워드를 대신해 프랑스군의 공세에 맞섰다. 1370년 잉글랜드로 소환된 그는 6,000명의 병력의 지휘권을 받고 칼레로 이동한 뒤 남하했다. 그의 군대는 솜 일대를 진군하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랭스 시 외곽에서 무력행진을 벌였고, 뒤이어 트루아를 위협한 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느무르에서 파리로 접근했다. 그동안 많은 마을을 점령했고, 몸값 지불을 거부하는 도시들을 파괴했다.
1370년 9월 24일, 놀스의 군대는 파리에 도착했지만 수비가 매우 견고해 공략이 불가능하자 파리 주변의 수많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해 수비대가 격분하여 요새 바깥으로 나오게 해 회전을 벌이려 했으나, 수비대가 이에 넘어가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결국 파리 공략을 포기한 놀스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루아르 강변의 여러 성과 수도원을 점령하고 푸아투나 노르망디 남부로 진군할 수 있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흑태자 에드워드가 북상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는 리모주 공방전을 치른 뒤 보르도로 돌아간 후 꿈쩍도 하지 않았다.
10월 2일,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했다. 게클랭은 즉시 전국에 전령을 보내 소집령을 내렸고, 11월 6일 캉에서 집결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얼마 후 장 4세 드 모켄시 휘하의 브르타뉴 분견대와 합세해 4,000명을 확보했으며, 뒤이어 샤텔로에 집결한 루이 드 상세르 휘하 1,200명과 합류했다. 12월 1일 캉을 출발한 게클랭은 이틀 만에 160km를 주파하여 르망에 이르렀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겨울 숙영지를 어느 곳에 건설할 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놀스는 프랑스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브르타뉴 서부로 철수한 뒤 고지대에 숙영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장군들은 척박한 브르타뉴 서부에서 약탈할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여기에 머물면서 주변 마을을 계속해서 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공격해오더라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는 그들에게 급료를 13주분만 지급했기 때문에, 약탈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매우 컸다. 놀스는 이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끝내 설득에 실패하자 2,0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 서부로 떠났다.
이후 남은 4,000명의 잉글랜드군이 12월 4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퐁발랭 전투에서 참패하고 자신을 추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놀스는 존 민스터워스의 부대와 합세한 뒤 1371년 초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퇴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고, 병사들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집단 탈영하기 일쑤였다. 마침내 푸앵트 생마티외 항구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이용 가능한 배는 단 2척 뿐이어서 당시 수백명으로 줄어든 잉글랜드군을 수송할 수 없었다. 결국 놀스, 민스터워스를 비롯한 간부들만 배를 타고 탈출했고, 남은 이들은 그들을 따라잡은 프랑스군에게 학살되었다.
대다수 병력을 잃고 간신히 살아돌아온 로버트 놀스와 존 민스터워스는 심한 비난에 시달렸다. 민스터워스는 패전의 책임을 놀스에게 떠넘기려 했고, 귀족들은 같은 영주인 민스터워스보다는 일개 기사인 놀스 쪽이 책임을 떠넘기기 쉽다고 여기고 이에 호응했다. 하지만 놀스를 개인적으로 아꼈던 흑태자 에드워드와 곤트의 존이 놀스를 옹호했고, 에드워드 3세는 민스터워스가 놀스의 명령에 불복종했으니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체포될 위기에 몰리자, 민스터워스는 에드워드 3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 편에 가담했다. 한편, 놀스는 패전의 책임을 전적으로 지지는 않았지만 10,000마르크의 벌금이 부과되고 영지가 몰수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373년 샤를 5세에 의해 브르타뉴 공작위를 상실한 장 4세 드 몽포르를 돕기 위해 브르타뉴로 갔지만, 게클랭이 브르타뉴 대부분을 휩쓸 때 별다른 저항을 못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377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상대하는 포르투갈 왕국을 돕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 함대 사령관 중 한 명이었으며, 1380년에 우드스톡의 토머스의 명령에 따라 브르타뉴로 파견되어 장 4세가 자기 공국을 되찾도록 협력했다.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 진압에 기여했으며, 폰테프랙트 성에 수도원을 세우고, 로마에 잉글랜드 병원을 설립하고, 스컬쇼프와 하플리의 교회를 복원하는 등 자선 활동에 힘썼다. 1407년 8월 15일 노퍽의 스컬소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