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6-16 23:39:27

태종(막)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c224;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d400> 초대 제2대 제3대
태조 태종 헌종
<rowcolor=#ffd400> 제4대 제5대 감국
선종 영조 경종
까오방 정권
<rowcolor=#ffd400> 제6대 제7대 제8대
민종 대종 광조
<rowcolor=#ffd400> 제9대 제10대 제11대
명종 계종 덕종
추존
문제 · 휴제 · 유조 · 의조 · 홍조 · 소조
비정통
홍왕

}}}}}}}}} ||
막조 2대 황제
太宗 文皇帝 | 태종 문황제
파일:막등영.jpg
묘호 태종(太宗)
시호 흠철문황제(欽哲文皇帝)
연호 다이찐(大正, 1530년 ~ 1540년)
막(Mạc / 莫)
당조아인(Đăng Doanh / 登嬴 / 등영)
생몰 기간 1500년 ~ 1540년
재위 기간 1530년 ~ 1540년

1. 개요2. 생애3. 정치4. 가족

[clearfix]

1. 개요

대월 막 왕조의 제2대 황제. 묘호는 '태종'(太宗)이며 다른 이름은 막프엉조아인[1]이다.

태조 막당중의 첫째 아들이며 태종의 치세 동안 대월 제국의 남북조시대가 개창되었고 동시에 막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다.

2. 생애

1517년, 부친 막당중이 후 레 왕조의 권신 쩐쩐과 친분을 맺기 위해 막당조아인으로 하여금 쩐쩐의 딸과 결혼하도록 했다. 막당중은 반란 진압에서 공을 세워 점차 정권을 장악했고, 1522년 레 소종의 명의를 빌려 막당조아인을 육미후(Dục Mỹ hầu / 毓美侯)로 봉하고, 금광전(金光殿)을 관리하도록 했다. 1527년, 막당중이 제위를 찬탈하고 막 왕조를 세운 후 첫째 아들 막당조아인을 황태자로 책립했다.

다이찐 원년( 1530년) 정월 초하루, 막당중이 연로함을 이유로 막당조아인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태상황을 칭하고 물러나 응이즈엉 현(宜陽縣) 고재(古齋)의 상광전(祥光殿)에 은거하며 물고기를 잡는 것을 업으로 삼고 노닐며 즐겼다. 이렇게 막당조아인이 마침내 즉위했다. 그러나 당시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의 세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막당중은 은퇴했지만 여전히 조정의 정치를 멀리서 통제하고 있었고, 실제 목적은 아들 막당조아인을 밖에서 지원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타인호아 사람 레이(黎意, 여의)가 스스로 후 레 왕조 종실의 외손이라고 칭하며 자주(椰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막당중은 진압군을 이끌고 레이를 마텃 강(馬漆江)에서 공격했으나 막 왕조의 군대가 연전연패하자 어쩔 수 없이 탕롱으로 물러났고, 태사(太師) 인국공(麟國公) 막꾸옥찐(莫國楨)을 남겨 방어하도록 했다. 막꾸옥찐 또한 전투에서 패하였고, 레이가 서도성(西都城, 현재의 타인호아)을 공격해 들어가자 세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그해 8월, 태종 막당조아인이 타인호아로 진격해 막꾸옥찐의 군사와 호앙호아 강(弘化江)에서 합친 뒤 레이의 반란군과 교전했으나 두 차례의 전투에서 레이에게 대패했고, 태종 막당조아인은 탕롱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는 막 왕조로 하여금 레이의 이름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들었다. 다만 오래지 않아 레이가 교만해져 방비를 하지 않았고, 결국 자주에서 막꾸옥찐의 기습을 받아 사로잡힌 뒤 탕롱에 압송되어 거열형에 처해져 죽었다. 레이의 잔당은 서쪽 애뢰(哀牢, 라오스)로 달아나 후 레 왕조의 유신인 응우옌낌에게 의탁했고, 이는 응우옌낌의 부흥 세력을 강대해지게 했다.

다이찐 4년( 1533년), 응우옌낌은 스스로 레 소종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레닌(黎寧, 여녕)을 찾아내 그를 황제로 옹립하고, '응우옌호아'로 개원하니 이가 곧 레장종이며, 후 레 왕조를 중흥시켰다. 이들은 서도성을 공격해 들어갔으며, 점차 대월 제국의 남부 지역을 점거했다. 태종 막당조아인은 북부 지역으로 물러나 지키니 이것이 남북조시대의 시작이었다. 동시에 레 장종은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 스스로 후 레 왕조의 자손이라고 칭하며 막씨가 제위를 찬탈한 일을 고하였다. 세종 가정제는 함녕후(咸寧侯) 구란(仇鸞)을 총독군무(總督軍務)로 삼고, 병부상서(兵部尙書) 모백온(毛伯溫)을 참찬군무(參贊軍務)로 삼아 군사를 징집해 베트남으로 진공할 준비를 하게 하니, 전쟁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다.

다이찐 11년 정월 25일( 1540년 3월 3일), 막당조아인이 붕어했다. 시호흠철문황제(欽哲文皇帝), 묘호태종(太宗)으로 했다.[2] 첫째 아들인 막푹하이가 뒤를 이었다.

3. 정치

태종 막당조아인의 재위 기간 동안 막 왕조는 1532년, 1535년, 1538년에 세 차례에 걸쳐 과거를 시행하였다. 저명한 인물인 응우옌빈키엠(阮秉謙)은 1535년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다. 태종 막당조아인은 문화와 교육을 매우 중시하여 1536년에 겸군공(謙郡公) 막딘코아(莫廷科)를 파견하여 국자감(國子監)을 중수하도록 했으며, 1537년에는 친히 태학(太學)을 시찰하였다.

4. 가족



[1] Mạc Phương Doanh / 莫方瀛 / 막방영. 《명실록》과 《명사》 <안남전>(安南傳)의 기록. [2] 《大越通史·逆臣傳·莫登瀛傳》:“(元和)八年庚子,乃明嘉靖十九年也。正月二十五日戊午,登瀛死,僭位十一年。登庸立其子福海,伪谥曰太宗钦哲文皇帝。” [3] http://www.guoxue.com/shibu/24shi/mingshi/ms_321.htm 明史·安南傳》:「(阮)敬有女,嫁方瀛次子敬典,因與方瀛妻武氏通,得專兵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