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2:05:06

탄하오밍

담호명에서 넘어옴
파일:담호명.jpg
중화민국 광서독군
정체 譚浩明
간체 谭浩明
한국식 독음 담호명
영문 Tan Haoming
월파(月波)
출생 1871년 7월 3일 청나라 광서성 용주현
사망 1925년 4월 17일 중화민국 상하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민족 좡족
학력 없음
직업 정치가, 군인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구 계계군벌의 일원으로 한때 광동에서 큰 세력을 떨쳤으나 몰락했다.

2. 생애

1871년 광서성 용주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는 농사를 짓다가 조선업, 산림업 등의 막노동에 종사하였는데 1894년 군에 입대하여 좡족으로 역시나 좡족인 루룽팅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그의 휘하에서 관대, 통령, 부장을 거쳤다. 1911년 7월, 광서순방영 통령에 임명되었으며 무창봉기가 발생하자 신해혁명에 호응하여 11월에 루룽팅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고 청조에 대항하였다. 이후 용주진수사를 거쳐 1913년 4월 광서육군 제2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육군중장으로 승진했다. 1914년 5월 용주진수사에 임명되었으며 1915년 위안스카이 홍헌제제를 단행하자 이를 부추기고 1등 남작에 봉해졌다.

처음에는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1916년 3월, 위안스카이와 관계가 결렬된 루룽팅이 호국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하면서 광서육군 3군 군장, 호국군 제5군 총사령으로 호국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광동독군에 임명된 루룽팅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3월에 광동독군 대리, 4월에 광서독군 대리가 되었으며 이후 루룽팅이 양광순열사로 승진되면서 1917년 4월 10일에 광서독군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부원지쟁의 결과로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경질되고 리징시가 새로 임명되자 천빙쿤과 함께 리징시를 국무총리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전하였고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선통제로부터 광서순무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루룽팅을 토역군 양광총사령으로 추대하여 장쉰에 대항하였다.

이후 복벽을 진압한 돤치루이가 구 국회와 약법을 복구하길 거부하자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하여 군정부를 조직하였는데 광동성장 주경란 등과 함께 그를 환영했다.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월계상연군총사령에 임명되어 호남성으로 진주하여 청첸, 자오헝티 등과 함께 안휘군벌 푸량쭤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루룽팅으로부터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으니 더 이상 싸우지 말라는 지령이 떨어지자 펑궈장의 정전령에 호응하여 진격을 멈추었다. 하지만 상계군벌의 장령들이 북양군벌의 최후의 근거지인 악양을 공격할 것을 독촉하자 결국 1918년 1월에 북벌을 재개했고 이 때문에 정전이 깨지고 호법전쟁이 재발하였다. 이때 호남독군에 추대되었으나 취임을 거부하고 호남군민양정으로 호남성을 사실상 지배했다. 이후 우페이푸의 공격으로 호남성에서 축출되었다.

1918년 쑨원이 광동에서 사실상 축출된 이후 루룽팅과 양광에서 떵떵거렸으며 1919년 1월, 광서육군무비당 교장, 광서 보진회(業保進會) 회장 등을 역임하고 1920년 12월 북양정부로부터 광서독군에 재임명되는 등 잘 나갔으나 1921년 6월, 쑨원 쉬충즈를 이끌고 루룽팅 토벌을 선언하면서 패배하여 광서성까지 쫓겨들어갔으나 1922년 6월, 광서성으로 진공한 천중밍의 군대를 몰아냈으며 8월에 북경정부부터 호위장군에 봉해졌다. 10월, 용주로 돌아왔으며 1923년 11월, 루룽팅이 광서 전성선후총판에 임명되면서 용주의 방위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1924년, 심홍영 리쭝런의 공격으로 루룽팅이 끝내 몰락하자 그를 따라 호남을 거쳐 상하이로 도주했다. 1925년 4월 17일, 그에게 앙심을 품은 부관에게 암살당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