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 라틴어: Quintus Titurius Sab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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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54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갈리아 에브로네스족의 영토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아버지) |
참전 | 갈리아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군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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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갈리아 전쟁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서 활동했으나 암비오릭스의 난에 휘말려 전사했다.2. 생애
아버지 루키우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는 기원전 89년 화폐 주조를 담당했고,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부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75년부터 폼페이우스의 부관으로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기원전 58년 갈리아 전쟁을 단행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참전했다. 기원전 57년 벨가이족과의 전쟁에 참여했으며, 기원전 56년 3개 군단을 이끌고 노르망디 일대의 부족들을 제압했다.기원전 55년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로 원정을 떠났을 때, 루키우스 아우룬쿨레이우스 코타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메나피족에 대한 징벌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기원 전 54년 11월 코타와 함께 14군단과 다른 군단의 5개 대대를 맡아 카르누테스족의 영역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이때 에브로네스 족장 암비오릭스가 그의 진영으로 쳐들어오자 격파했다.
암비오릭스는 사절을 보내 화해를 청하면서, 로마군을 공격한 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족민들이 벌인 일이고, 갈리아 전체가 이미 들고 일어날 예정이며 게르만족 대부대가 라인강을 건너 이틀 뒤 숙영지를 대대로 공격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로마를 지지하므로 이를 귀뜸해주는 것이니, 게르만족이 이르기 전에 이 지역에서 철수하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로마군이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을 통과할 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코타는 요새화된 진영을 방어하고 카이사르가 구원하기를 기다리자고 주장했지만, 사비누스는 암비오릭스의 조언을 따르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더 높은 직위에 있던 그의 의견이 관철되었고, 로마군은 숙영지를 떠나 숲길로 행군하다가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갈리아군의 습격을 받았다. 코타는 부대에게 짐을 버리고 원진을 짜라고 지시하여 항전했던 반면, 그는 어찌할 바 몰라 허둥지둥거리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포위망을 풀 가망이 없고 병사들이 점점 죽어나가자, 그는 암비오릭스에게 통역을 보내 자신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암비오릭스가 회담하러 오라고 하자, 그는 이에 따르려 했다. 코타는 얼굴에 돌을 맞아 중상을 입은 몸이었지만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끝까지 싸우다 죽자"고 강하게 권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를 뿌리치고 회담하러 갔다가 기습공격을 받아 부관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코타는 그대로 남아 로마군을 지휘하다가 갈리아군의 맹공격으로 전사했다. 이리하여 제14군단과 5개 대대는 전멸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이 패배의 원인이 오로지 암비오릭스의 책략에 속은 사비누스의 아둔함에 있다고 몰아세웠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애초에 로마에 적대적인 부족민들의 영역에 군대를 분산시켜 배치한 카이사르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으며, 카이사르가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 사비누스를 무능한 장군으로 매도했다고 본다. 실제로 독자적으로 노르망디 일대의 갈리아족을 평정했고,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났을 때 반란을 일으킨 메나피족을 제압하기도 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편이었던 그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무능하고 겁많은 인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