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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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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
한문 戚本禹
한국식 독음 척본우
영문 Qi Benyu
출생 1931년 5월 8일 중화민국 산둥성 웨이하이
사망 2016년 4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국적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직업 정치가
종교 없음(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문화대혁명의 일원2.2. 갑작스런 몰락2.3. 말년
3. 저서4.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1950년 19살 때 장칭이 운영하는 마오쩌둥 개인 사무실 기밀 담당 비서로 선발되었고 1966년 중앙문혁소조 조원으로 선임되어 문화대혁명 초기 야오원위안과 함께 희곡 <해서파관(海瑞罢官)> 비판 활동을 전개하고 류사오치 일당으로 간주된 이들의 숙청을 주도했다. 그러나 1967년 주중 영국 대사관 점령 사건 이후 왕리, 관펑과 함께 체포되어 1968년 진청교도소에 수감되어 18년간 투옥되었다.

2. 생애

2.1. 문화대혁명의 일원

치번위는 1931년 5월 8일 산둥성 웨이하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명나라 때 왜구를 격퇴한 명장 척계광이다. 그는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니다가 1942년 상하이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상하이 남양모범 중학교를 졸업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1950년 19살때 중국 최고 지도부의 집단 거주지인 중난하이에 들어가 장칭이 운영하는 마오쩌둥 주석 개인 사무실 기밀 담당 비서로 선발되었다.

1958년 3월, 중국 공산당 중앙기관에서 청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 치번위, 린커(林克) 등 8명의 젊은 간부들은 중앙정치비서실의 문제점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에 중앙정치비서실 간부들은 이들을 '반당분자'라고 낙인 찍고 반우파 투쟁 때 이 8명의 젊은 간부들을 거세게 비판했다. 그때 마오쩌둥이 개입해 당에서 제명될 뻔했던 그들을 옹호해 사건을 유야무야시켜줬다. 이후 치번위는 마오쩌둥의 신임을 얻고 점차 공산당 내 입지를 다져나갔다.

1963년, 치번위는 태평천국의 명장이었던 이수성(李秀成) 평전을 출간했다. 마오쩌둥은 그의 글을 칭찬했고 그가 당 기관지 <홍기(紅旗)>의 편집 감독관이 되게 해줬다. 그후 1965년 12월 8일, 치번위는 홍기 13호에서 <혁명을 위해 역사를 연구한다>를 발표했다. 계급 투쟁을 중시하면서도 역사주의를 중시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은 "초계급", "순객관적"의 자산계급 관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현재의 권위는 누구에게 있는가? 야오원위안, 치번위, 인다(尹達) 등 어린 나이에도 학식이 풍부하고 안정적이며 정치경험이 있는 굳건한 사람들이 계승해야 한다."고 옹호했다.

1966년 초, 치번위는 홍기의 부편집장으로서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晗)의 희곡 해서파관에 대한 야오원위안의 비판을 적극 옹호했다. 그후 마오쩌둥의 비서였던 톈자잉(田家英)이 마오쩌둥의 담화를 기록하다가 해서파관의 문제를 살짝 언급한 것을 "담화주제와는 무관하다"고 여겨 삭제했다가 장칭, 천보다에게 "주석 저작을 함부로 고쳤다."는 비난을 받고 1966년 5월 20일에 정직 처분을 받고 자살하자, 치번위는 그를 대신해 마오쩌둥과 장칭의 비서가 되었다.

1966년 5월 28일, 치번위는 중앙문화혁명소조의 일원이 되어 야오원위안과 함께 류사오치 일당으로 간주된 이들을 비난하고 홍위병들을 선동해 '반동분자'를 타도하게 했다. 이후 치번위는 중앙판공청 비서국 부국장, 중국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을 역임했다. 또한 치번위는 1967년 3월 30일 홍기 5호에 <애국주의인가 매국주의인가? - 역사영화 '청궁비사' 평론>을 개재해 류사오치를 실명은 거론하지 않은 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이 평론을 극찬했고 4월 1일 인민일보에 전문을 개재하게 했다. 이후 치번위는 "당내 최대의 중도주파와 반혁명수정주의 노선"에 대한 "혁명 대비판"의 기조를 정했다.

이후 치번위는 홍위대를 선동해 펑더화이를 쓰촨에서 베이징으로 강제로 끌고 와 온갖 모욕과 구타를 가하게 했고 중난하이에서 덩샤오핑, 주더, 타오주(陶铸) 등을 비난했다. 이시기 그의 위세가 대단해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난야요베이치(南姚北戚: 남에는 야오원위안, 북에는 치번위)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2.2. 갑작스런 몰락

1967년 3월,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전역이 대혼란에 휩싸이자 인민해방군 장성들의 강력한 건의를 받아들여 군대가 홍위병들을 진압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2월 역류 이후 천보다, 캉성, 장칭을 비롯한 중앙 문혁소조는 군부를 반동세력의 본거지로 간주하고 맹비난을 퍼부었고, 우한에서 발생한 7.20 사건 이후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때 치번위는 '조반파' 홍위병을 선동해 보수파 홍위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게 했다.

그러던 1967년 8월, 치번위는 67폭동에 대한 영국의 강경진압을 맹비난했으며 외국 대사관을 공격하고 서구 열강과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외교부를 타도하자는 왕리, 관펑 등의 주장에 적극 찬성했다. 결국 1967년 8월 22일, 왕리, 치번위 등의 선동을 받은 홍위병들은 영국대사관에 난입해 영국인들을 구타하고 건물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중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마오쩌둥에게 왕리가 홍위병들을 선동해 이 사태를 야기했으며 관펑, 치번위도 이를 부추겼다며 이들을 숙청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왕리, 관펑을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치번위는 잠시 두고 자아비판만 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치번위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마오쩌둥 앞에서 왕리, 관펑을 비판하는 자료를 폭로하며 그들을 반당분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입지는 갈수록 위태로워졌고 천보다, 캉성, 장칭으로부터 "왕리의 주구"라는 비난을 받았다.

치번위는 아버지처럼 모시던 마오쩌둥에게 구원을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1967년 9월 4일, 치펀위는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왕리와 관펑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개조하여 영원히 마오쩌둥의 충실한 작은 병사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마오쩌둥은 이 편지를 읽은 후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편지는 잘 읽었다. 실수를 범했을 때 깊이 사색하여 잘못을 시정하는 것은 유용하다. 관펑, 왕리 두 동지에게도 내 말을 전해라."

그러나 치번위의 편지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1967년 12월, 천보다는 홍기 편집부 임원들을 모아놓고 완리, 관펑, 치번위의 극좌적 행태를 맹비난했다. 이에 홍기 편집부 임원들과 중앙 문혁소조의 직원들이 일제히 치번위를 비난했다. 결국 1968년 1월 14일, 치번위는 긴급 체포되어 격리 심사를 받고 진청교도소에 수감되었다.

2.3. 말년

1980년 7월 14일, 치번위는 베이징 공안국에 의해 감옥에서 끌려나왔다. 그후 그는 1983년 11월 2일 베이징 중급 인민법원으로부터 '반혁명 선동 및 모함죄'로 기소되어 징역 18년에 공산당원 자격정지 4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이미 감옥에서 15년간 투옥되었기 때문에, 그는 3년 후인 1986년에 석방되었다.

치번위는 출옥한 후 상하이 도서관 수장부에서 도서관리원으로 일하다가 1990년대 초에 은퇴했다. 이후 그는 역사를 연구하며 관펑 등과 함께 9권 200만여 자에 달하는 <중화역학대사전(中華易學大辭典)>을 편찬했으며 중화민국 초대내각 총리인 탕사오이를 연구하여 '진선법사(真禪法師)' 등의 저서를 편찬했다. 또한 그는 밍보(明報)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의 '마오쩌둥 주치의 회고록'을 "자신이 모시던 주군의 사생활을 함부로 폭로했다."며 비판했다.

2014년, 치번위는 홍콩 밍보와의 인터뷰에서 “ 시진핑 주석은 마오 이후 반(反) 부패를 실천한 유일한 국가지도자”라며 “마오쩌둥이 애써 도모한 무산계급혁명의 후계자이자 제2의 마오쩌둥”이라고 평가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16년 4월 20일, 그는 상하이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3. 저서

4.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