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0:13:17

지병학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참고문헌

1. 개요

빨치산 출신의 북한 군인, 정치가.

2. 생애

1917년 5월 24일, 길림성 화룡현에서 태어났다. 1931년에 혁명에 투신하여 1934년에 김일성 유격대에 들어갔다. 소대장을 거쳐 중대 정치지도원에 임명되었다. 소련군 88여단에 배치되었다. 소련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시작되자 오백룡, 백학림, 김창봉, 석산과 함께 소련군 정찰부대원으로 소속되어 오케얀스크 국영농장에 주둔했다.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이후 "과거의 조직선을 복구하고 옛 동지들을 찾아서 오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받아 바로 귀국하지 않고 만주로 파견, 국공내전에 참가했다. 그래서인지 1945년 12월에 훈춘경비대대 부사령을 맡은 기록이 있다.

귀국 후 1949년 북한인민군 12사단 참모장에 임명, 1950년 8월 4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51년 4월에 12사단장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휴전 이후 1956년 12월, 45사단장, 부군단장, 집단군 부사령관을 거쳐 1957년 9월, 2군단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61년 2월 상장에 진급한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후 진답군 사령관을 지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의 집행부 위원으로 참가했다. 1967년 6월, 민족보위성 부상 겸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1967년 10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개교 15주년 집회에서 보고자를 맡았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69년 6월, 군사대표단장으로 알제리를 다녀왔으며 1970년 11월,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71년 3월, 군사대표단장으로 몽골에 파견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가 출범하자 대의원에 재선, 민족보위성이 인민무력부로 개편되면서 후방총국장을 거쳐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유임되었다. 1975년 2월, 조선인민군 창건 27주년 기념 논설을 로동신문에 게재하였다. 하지만 서철, 오진우 등이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호소하는 기고를 적극적으로 할 동안에 지병학은 약간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1977년 2월 28일, 21시에 만 59세를 일기로 숨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이 아시아식 나이를 쓸 때라서 부고에는 61세로 보도되었다. 인민무력부는 부고를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동지는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일편단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끝없이 충직하였으며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하여, 인민군대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

하지만 말년에 뭔 일이 있었는지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직 언급은 없이 '인민무력부 부부장 상장 지병학'으로만 보도되었다. 부고에서도 중앙위원회나 중앙인민위원회는 빠지고 인민무력부 직함만 들어갔다. 이에 대해서 " 지경수와 함께 김동규를 철저히 비판하지 않고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가 비판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정작 김동규는 1977년 후반기까지 건재했으므로, 지병학이 죽었을 때는 김동규가 숙청되기 전의 일이었다.

어쨌거나 빨치산 1세대로 정중한 예우를 받아 국장이 거행되고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 반신상이 제작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