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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최자실 (崔字實)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 | 1915년 8월 15일 |
일제강점기 황해도 해주군 | |
사망 | 1989년 11월 9일 (향년 74세) |
미국 로스앤젤레스 | |
학력 |
평양도립간호학교 순복음신학교(현 한세대학교) |
가족 |
남편 김창기 자녀 김성수, 김성광, 김성혜 사위 조용기 |
종교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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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오순절교회 목사. 조용기 목사의 장모.2. 생애
2.1. 어린 시절
1915년 8월 15일 황해도 해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자실이 6세 때 지병으로 사망하여, 이후 최자실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독학으로 공부하여 친구가 하고 있던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고, 명신여학교 졸업과 동시에 평양도립병원 간호원 채용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이후 한경직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신의주제2교회에 출석하여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던 중 배재학당과 주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김창기와 1942년 결혼하였다.
2.2. 월남 이후
광복 이후 월남하여 자신이 모아놓은 자산을 가지고 성냥공장과 비누공장을 개업하여 전국 규모로 확장하는 데 성공하여 부유하게 생활하다가, 1953년 어머니와 맏딸의 사망과 함께 사업실패로 재산도 날아갔다. 그 때문에 스트레스로 심장병도 찾아왔다.최자실은 북한산 기슭에서 음독자살을 시도하였으나,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약봉지가 날아가버렸다. 몇 차례 더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하산했다.
하산하던 중 우연히 어릴 적 친구 따라서 가 본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가 하산길 근처에서 열리고 있었고 참석하여 성령체험을 했다고 한다.
최자실은 이성봉 목사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목사는 순복음신학교를 소개해주었고, 최자실은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했다.
신학교에서 아들뻘인 22세 신학생 조용기를 만나 팀원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노방전도와 새벽기도 등을 함께 다녔다. 1958년 졸업 직후 조용기 전도사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관할 불광동에 천막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지금의 여의도순복음교회다.
2.3. 여의도순복음교회
천막교회를 세우기 전 불광동과 대조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네 어린이들에게 찬송과 성경을 가르쳐주며 어린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60~70명의 어린이들이 모이자 천막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장년 예배가 처음 열린 1958년 5월 18일에는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 김성혜, 김성광, 비를 피해 천막 안으로 들어온 할머니까지 총 5명이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처음 출발했다.거듭되는 부흥 및 재적교인 수의 폭발적인 증가로 고심하던 중 1961년 9월 서대문로터리 (현. 서대문역 교차로) 인근에서 천막 부흥회가 열렸는데 성회가 진행될 때 많은 환자들이 고침을 받는 등 큰 변화가 일어나자 개척 3년 만인 1961년 10월 15일, 서울시 서대문구 의주로로 천막을 옮겨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1962년 2월 18일 당시 교회명칭인 '순복음부흥회관' 헌당예배를 드렸다.
당시 '순복음부흥회관'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 회관 및 바위샘교회로 사용되다가 2017년 철거되어 현재는 D타워 돈의문이 들어섰다.
서대문에 있는 순복음교회 건물로도 성도 수가 계속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교회를 확장 이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또 매주 일요일마다 서대문 교차로 일대가 마비상태에 이르자 서울시에서 확장 이전하라는 권고가 내려와 여의도로 이전을 결정했다.
1989년 11월 9일 워싱턴 D.C. 순복음교회 성회 인도와 순복음 나성 국제금식기도원 창립 4주년 기념 금식기도회 인도차 미국 방문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1월 15일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인도되어 발인과 함께 경기도 파주시 오산리에 위치한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