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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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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초(楚)나라 4대 왕
성왕
成王
미(羋)
웅(熊)
군(頵)[1], 운(惲)
아버지 초문왕(楚文王) 웅자(熊眥)
어머니 식규(息嬀)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26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치세2.3. 최후
3. 평가

[clearfix]

1. 개요

초나라의 20대 군주, 4대 . 초문왕 식규의 아들.[2] 북쪽으로 세력을 뻗어 초나라의 힘을 강대하게 하여, 홍수 전투에서 송양공에게 타격을 입혔으나 진문공과의 성복 전투에서 패배하고 태자 상신의 협박으로 자살한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초 문왕이 기원전 675년에 승하하고 장남 웅간이 뒤를 이었다. 웅간은 사냥과 놀이를 즐기며 정사를 등한시했기 때문에 즉위한지 3년째인 기원전 671년, 웅군이 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된다. 식규[3]는 그 사실을 알았으나 묵인한다. 형한테는 시호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웅간은 장사를 지낸 곳의 이름을 따서 장오라고 불린다.

2.2. 치세

초 성왕 원년(기원전 671년), 초나라 왕으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렸다.[4] 초나라가 왕을 칭한 뒤로는 처음으로 주나라 왕실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초 성왕 6년(기원전 666년), 당시 실권자인 공자 선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2년 뒤인 초 성왕 8년(기원전 664년), 공자 선을 숙청하고 왕권을 회복한 초성왕은 절치부심하여 투누오도와 함께 정사를 돌본다[5]

초 성왕 13년(기원전 659년), 초 성왕 14년(기원전 658년), 초 성왕 15년(기원전 657년), 이 3년 동안 연달아 정나라를 쳤고 정나라는 그 공격을 끝내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정나라 군주인 정문공은 초나라와 화친하기 위해 정나라의 대부 공숙을 보내 강화하여 제나라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성왕이 선정을 베푼 지 십수년이 지난 후 주 왕실에 대한 조공을 끊어버리자 초 성왕 16년(기원전 656년), 당시 춘추오패였던 제환공 관중의 조언을 받아들여 주 소왕이 남정했을 때 죽게한 죄와 공물을 끊은 죄를 물어 초나라를 공격해왔다. 결국 이것을 두려워한 초 성왕은 굴완에게 병력을 거느리게 하여 소릉에서 그것을 사죄하는 회맹을 가졌다. [6] 그리하여 양국은 전투없이 일을 끝냈다.

초 성왕 17년(기원전 655년), 현(弦)나라를 멸망시켜 그 군주가 황나라로 달아났다.

초 성왕 18년(기원전 654년), 허나라를 쳤다.

초 성왕 21년(기원전 651년), 제환공이 규구에서 회맹할 때 초 성왕은 감히 제 환공과 정면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7][8]

초 성왕 22년(기원전 650년)에 황나라를 쳤다.

초 성왕 23년(기원전 649년) 겨울, 성왕은 황나라가 공물을 바치지 않자 황나라를 쳤다.

초 성왕 24년(기원전 648년), 성왕이 강나라를 쳤다. 여름에는 황나라가 망했다.

초 성왕 26년(기원전 647년), 영(英)나라가 망하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초나라는 회수 일대에 세력을 미치게 된다.[9]

초 성왕 27년(기원전 645년) 봄, 서나라를 쳤다. 3월 제 환공은 송나라, 노나라, 진(陳)나라, 위(衛)나라, 정나라, 허나라와 함께 서나라를 구원했다.

초 성왕 29년(기원전 643년), 제 환공이 죽고 제나라에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자 성왕은 중원에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야망을 노골화했다.

이 무렵 송나라 송양공이 패자가 되기 위해서 제나라, 초나라 등의 여러 나라와 회맹을 가졌으나 초 성왕은 송나라의 국력이 초나라보다 약한 것을 알고 그를 무시하였다. 그때 송 양공은 자신이 공작이고, 초 성왕이 자작임을 상기시켰으나, 그 언사가 심히 모욕적이었기 때문에 초 성왕은 거기에 앙심을 품게 되었다.

초 성왕 30년(기원전 642년), 정 문공이 초나라에 입조했다.

초 성왕 32년(기원전 640년), 수(隨)나라가 초나라를 배신하자 초 성왕이 겨울에 투누오도를 보내 수나라를 치니 수나라가 강화를 요청했다.

초 성왕 33년(기원전 639년), 송나라를 기습하여 송 양공을 사로잡았는데, 송나라 공자 목이가 송나라의 공작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초 성왕은 송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송 양공을 놓아주었으나 목이는 사심없이 그 자리를 송 양공에게 돌려주어 초 성왕은 닭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보고 있는 격이 되고 말았다.

초 성왕 34년(기원전 638년), 정 문공을 입조하게 했으며, 송나라를 쳐서 홍수 전투에서 송 양공에게 부상을 입혔다.[10] 그리고 다음해 송 양공은 사망했다.

초 성왕 35년(기원전 637년), 성득신에게 진(陳)나라를 치게 하여 초 땅과 이 땅을 차지해 병력을 주둔시켰다. 성왕은 성득신의 공로를 인정해 영윤에 봉했다.[11] 같은 해 겨울, 진(晉) 문공이 정나라에서 초나라로 오자, 그를 환대했다. 그러자 성득신이 그를 죽일 것을 권했으나 단칼에 거절했다.

초 성왕 37년(기원전 635년), 성득신에게 진(秦)나라의 병력을 추격하게 했다.

초 성왕 38년(기원전 634년), 노희공이 초나라 병사를 빌려서 제나라를 정벌하여 곡 땅을 취했다. 제 환공의 7명의 아들들이 초나라로 달아나자 초 성왕은 그들을 상대부에 봉했다. 그리고 기나라 자작이 그의 선조 축융과 육웅을 제사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기(夔)나라를 멸했다. 같은 해 여름에 송나라를 쳤는데, 송나라는 진문공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초 성왕 42년(기원전 630년), 영윤 성득신이 진 문공의 진을 칠 것을 권했으나 초 성왕은 거절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들어주었다. 진 문공은 초나라에 의탁하던 시절 이런 약속을 했었다.

"제가 진(晉)나라의 군주가 된다면 90리를 물러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진(晉)나라 측에서는 약속을 이행했다.[12] 같은 해 4월 성득신은 진(晉)군과 싸운 성복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성왕은 크게 노하여, 성득신에게 자결을 명했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후임으로 위여신을 영윤으로 삼았다. 그 소식을 들은 진 문공은 크게 기뻐했다.

훗날 이 고사는 여러 나라에서 흔하게 쓰여졌다. 춘추시대의 사례로는 진(晉)경공 필 전투[13]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장수 순림보를 참수하려고 하자, 신하인 사악탁이 반대하면서 초 성왕이 성득신을 죽인 고사를 언급했다. 그리고 3년 뒤 순림보는 장량에서 적족의 일파인 노씨(潞氏)를 크게 물리쳐 승장으로 돌아왔고, 경공은 기뻐하면서 순림보에게 큰 상(노예 1,000명과 영지와 재물)을 내리며, 사악탁에게도 3년전 순림보를 함부로 해하지 않게 한 공로라며 큰 상을 내리고 치하했다.

삼국시대에는 장완이 마속을 죽이는 것을 말릴 때 언급한다. 물론 제갈량은 초 성왕처럼 마속을 용서없이 사형에 처했지만.

2.3. 최후

초 성왕 46년(기원전 626년), 웅상신을 폐태자하고 총애하는 왕자 웅직을 태자로 세웠다. 같은 해 10월 웅상신은 이에 불만을 품어 반숭과 모의하여 초 성왕을 살해하러 갔다. 그러자 초 성왕은 웅상신이 반란을 일으킨 지 얼마 안 되어 준비가 안 되어 있음을 간파해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곰발바닥 요리가 먹고 싶다."

그러나 웅상신은 이를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곰 발바닥은 익히기 어렵잖소!"

곰 발바닥은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익히는 데 며칠이 걸린다. 초 성왕은 그동안 지방의 근왕군이 상경하여 웅상신을 토벌해주길 기대한 것이다.[14]

결국 초 성왕은 아들의 핍박을 못이겨 스스로 목 졸라 자결했다.[15] 그래도 아버지인지라 초목왕이 장사는 후히 지내주었다고는 하지만, 태자를 폐위하려는 시도에 어지간히 쌓인게 있는지 영(靈)이라는 시호를 줄 것도 고려한 적이 있다. 이게 얼마나 좋지 않은 의미인지는 시법 문서 참고.

3. 평가

초 성왕은 일단 국외 관계에서는 주나라를 무시하는 행보를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16], 그래도 초나라가 주나라와 당시 세력을 휘두르던 춘추오패가 주도하는 중원의 질서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했다.[17] 내치적으로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외부에 힘을 떨쳐, 그 아들인 초목왕이 그것을 이어 나라를 잘 다스리고, 그 손자인 초장왕이 나라를 크게 번성시켜 춘추오패가 된다.

[1] 이 한자의 의미는 머리가 큰 모양을 나타내는 한자. 즉 대두(大頭)라는 뜻이다. [2] 그런데 초문왕이 식규를 취한 것은 기원전 680년이고 초성왕이 형을 시해하고 즉위한게 기원전 671년이다. 때문에 초성왕의 나이는 형이 있다는 점까지 감안해야 하기에 생년을 최고로 일찍 잡아도 기원전 678년이기에 즉위시에 나이를 많이 잡아도 8살이다. 이 나이에 정변을 주도했다는게 상식에 맞지 않고 그에 더해 9살 이하인 형 장오가 사냥에 정신팔렸다는 것도 이해가 안될 일이다. 때문에 초성왕의 정변은 본인의 의지가 아닌 후견인들간의 싸움이었거나 장오와 초성왕 모두 식부인이 아닌 초문왕의 예전 부인의 소생이었다는 이설이 가능해진다. [3] 도화부인이라고도 불린다. [4] 단 공자 선(善)이 실권자였다. [5] 이 당시 초나라는 주위 소국을 흡수하거나 속국으로 만들면서 세력을 키웠지만, 정나라 원정을 가기에는 아직 국력이 모자랐다. [6] 다만 아주 발리기만 한 건 아닌 게, 굴완이 주소왕의 최후를 알려줌으로써 초나라의 자존심을 은근히 세웠다. [7] 서로의 국력을 잘 모르는 것도 있고, 초나라가 당시 제나라와 싸우는 것은 원정으로 인한 상당한 경제적, 군사적 부담을 각오해야 했다. [8] 더욱이 초나라가 주소왕마저 저승에 보내버린 천혜의 요새인 한수(漢水)를 끼고 있는 점도 둘의 싸움을 지지부진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9] 《삼국지》에 나오는 수춘 일대. [10] 그런데 이건 송 양공의 자업자득인게, 전쟁터에서 인의를 따지면서 기습할 기회가 몇 번 있었음에도 그것을 시행하지 않다가 험한 꼴을 당했다. 이것을 두고 송양지인이라 한다. [11] 영윤은 초나라 최고의 벼슬이다. 진(秦)나라 이후의 승상과 같다. [12] 단 이것이 초군을 유인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말도 있다. [13] 기원전 597년에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벌인 전투 [14] 즉 위의 대화를 쌈빡하게 풀어보면 "지방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 "그걸로 날 토벌하시려는거 아니까 그냥 죽으시죠" 라고 할 수 있다. [15] 단 마냥 욕할 수는 없는 게, 진나라의 헌공이 여희의 말을 믿고 신생을 자살하게 하고 진 문공을 방랑하게 한 사례가 있었기에, 그 사례처럼 되지 않으려는 발로로 보아야 한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시대상을 생각하면 태자로써 왕이 되지못하고 다른 사람이 왕이 되면 당연히 죽은 목숨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런 점에선 양녕대군이 제 명대로 산 것은 아주 이례적이다. 이방원도 양녕을 폐위하는 결정을 내리고 목이 메도록 울었다는데, 자신의 행적을 생각해도 단순히 왕 자리를 뺏은 게 아니라 목숨까지 뺏은거나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6] 단, 초나라 자체는 원래 이민족 국가라 주나라의 질서에 반대 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17] 위에 언급한 제환공의 정벌 행위에 명목상이나마 조공을 보낸 것이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