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차영상(車永祥)[1] |
본관 | 연안 차씨 |
출생 | 1927년 8월 29일 |
평안북도 선천군 | |
사망 | 1950년 6월 29일[2] |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동화백화점 부근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47판-1면-84호 (3행 16열)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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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군인. 한국광복군에 복무한 경력이 인정되어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일명 차영상(車永祥)[3]2. 생애
1927년 8월 29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1944년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 서주 교외에서 복무하던 중 5월 18일 승영호[4], 노능서와 함께 탈출, 안휘성 임천 한광반을 찾아 입소하였다.
1944년 10월 경 김우전, 전이호, 노능서, 김중섭, 장준하 등과 한광반 1기를 수료하였고, 김학규 지대장 휘하에서 김문택, 전이호와 훈련교관을 맡아 입대한 장병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광복군 제3지대 창설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제3지대 창설 후 지대 본부에서 편제, 교육, 훈련, 정훈 등을 분담해 창설 기간장교로 주된 역할을 하였고, 김문택과 함께 훈련교본 및 구호제정을 손수 만들어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광복 후 1948년 4월 6일 육군사관학교 5기를 졸업, 임관하였고 1949년 1월 김학원, 박춘식, 이원엽 등과 육군사관학교 구대장으로 9기 생도들의 훈련을 담당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시 서울지구 헌병대사령부 헌병대장(육군 중령)[5]으로 복무 중 6월 29일 동화백화점[6] 부근에서 북한군의 서울 점령을 막던 중 전사하였다.[7]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가 봉안되었다.
장창국 전 합참의장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회고록에 따르면 딸이 있으며 의사가 되어 1983년 당시 경기도 성남시에서 병원을 개입했다고 한다.
3.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독립운동사 제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