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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연일 승씨[1] |
출생 | 1920년 10월 24일 |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2] (현 평안북도 정주시 신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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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8년 5월 4일 |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자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5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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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승진· 승병균 형제는 그의 6촌 재종형(再從兄)이다.
2. 생애
승영호는 1920년 10월 24일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현 정주시 신안리)에서 아버지 승계정(承啓鼎)과 어머니 배천 조씨(白川 趙氏) 조예균(趙禮均)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동생 승영휘(承永暉)·승영시(承永視) 등이 있었다.그의 직계는 대대로 문관을 종종 배출했는데, 10대조 승득운(承得運)은 1675년( 숙종 1) 식년시 문과에 병과 21위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정6품)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6대조 승경술(承景述)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를 지냈고, 5대조 승응조(承膺祚)는 1782년( 정조 6) 평안도별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에 올랐다. 또한 그의 백증조부[3] 승진태(承鎭泰)는 1846년( 헌종 12) 식년시 문과에 병과 22위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라난 그는 1942년 9월 일본 도쿄 소재 주오대학 상과를 졸업하였으며, 1944년 1월 20일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 같은 해 5월 중국에 있던 일본군 부대를 탈영하였고,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이후 중국국민당 중앙육군군관학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된 한광반(韓光班)에 입교하여 1944년 10월에 훈련을 마쳤고,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군법무실에 배속되어 항일 활동을 전개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조국으로 귀환하였으며,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4반에 입교하여 그해 4월 27일 임관하여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54년 7월 대령으로 예편한 후에는 제주병무청장을 역임하였다.
1988년 5월 4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승영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8년 5월 6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