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 리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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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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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67 · 1968-69 · 1969-70 · 1972-73 | |||
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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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Ballond'or | ||
수상 잔니 리베라 |
2위 루이지 리바 |
3위 게르트 뮐러 |
1970 Ballond'or | ||
수상 게르트 뮐러 |
2위 바비 무어 |
3위 루이지 리바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
1968 |
루이지 리바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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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아리 칼초 영구결번 | ||||||||||||||||||||||||||||||||||||||||||||||||||||||||||||||||||||||||||||||||||||||||||||||||||||||||||||||||||||||||||||||
No. 11 |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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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지 리바 Luigi Riv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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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4년 11월 7일 | ||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주 레지우노 | |||
사망 | 2024년 1월 22일 (향년 79세) | ||
이탈리아 칼리아리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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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0cm | ||
직업 |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행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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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 |
AC 레냐노 (1962~1963) 칼리아리 칼초 (1963~1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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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가 |
칼리아리 칼초 (1986 / 회장) 이탈리아 축구 연맹 (1988~2013 / 이사) 이탈리아 대표팀 (2006 / 기술 고문) 칼리아리 칼초 (2019~2024 / 명예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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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42경기 35골[1] ( 이탈리아 / 1965~197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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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 칼리아리 칼초 - 11번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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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인.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별명은 천둥번개(Rombo di Tuono).선수 경력 14년 중 13년을 칼리아리 칼초에서 보내면서 구단 최초이자 유일한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다.[2] 또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역대 최다 득점자로 등극하며 유로 1968 우승에 공헌하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1962-63 시즌 3부 리그 소속의 레냐노에서 프로로 데뷔했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줘 1년만에 칼리아리 칼치오로 이적했다.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칼리아리에서 리바는 주전 공격수로 나서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고 세리에 A에서 첫 시즌 32경기 9골을 넣으며 존재감을 알렸다. 리바는 1975-76 시즌 은퇴하기 전까지 칼리아리에서만 활약했으며 비교적 약팀에 불과했던 칼리아리에서 득점왕을 4차례나 차지했다.1968-69 시즌 리그에서만 20골을 작렬한 리바는 팀을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인 2위에 안착시켰다. 이어지는1969-70 시즌 21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리바와 30경기에서 11골만을 허용한 짠물 수비로 칼리아리는 구단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1970년 거함 유벤투스가 리바의 영입을 원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1975-76 시즌 밀란과의 경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칼리아리 자체가 워낙에 별볼일이 없는 클럽이기 때문에 칼리아리에서만 헌신한 리바의 클럽 커리어 역시 다른 역대급 공격수들에 비해 초라한 편이다.[3]
2.2. 국가대표
1965년 헝가리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으며 1974년 대표팀을 떠날 때까지 42경기 35골이라는 순도 높은 결정력을 보여주며 아직까지도 이탈리아 대표팀 사상 최다 득점자에 위치하고 있다.[4]유로 1968이 첫 메이저 대회 참가인데, 리바는 대회 베스트팀에 선정되는 활약을 보여주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70년 월드컵에는 도멘기니, 보닌세냐와 함께 공격진을 구성하며 이탈리아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1974년 월드컵이 그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였으며. 대회 종료 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상위 호환격인 선수로 강력한 왼발 피니시가 주무기였다. 거기에 오른발도 못쓰는 편은 아니었고 몸싸움, 헤더 능력, 슈팅 테크닉 등 뭐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공격수였다. 거기에 주력까지 빠르니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 괜히 천둥번개란 별명을 가진게 아니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칼리아리의 경영진에 합류했고 2006 독일 월드컵 때는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 고문을 맡기도 했다.2005년 은퇴한지 30년이 지난 시점, 칼리아리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던 리바를 기리기 위해 그가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인 11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5]
2019년부터는 새로이 팀을 인수한 톰마소 지울리니 회장에 의해 명예 회장으로 선임되며 구단 레전드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있다.
5. 사망
2024년 1월 22일, 사르데냐섬의 자택에서 심정지를 일으켜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세.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69; 3위: 1970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68
- 세리에 A 득점왕: 1966-67, 1968-69, 1969-70, 1972-73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64-65, 1968-69, 1969-70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71
- FUWO 유럽 올해의 팀: 1969, 1970
- Sport Ideal 유럽 XI: 1973
- 골든풋: 2005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
-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15
- 칼리아리 칼초 명예의 전당
- 칼리아리 칼초 올타임 XI
6.3. 수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3등급: 1991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2등급: 2000
7. 여담
국가대표팀에서 터뜨린 35골 가운데 17골은 월드컵 지역 예선전 + 본선 무대에서 넣은 것으로, 전세계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다. 또한 이탈리아 선수로는 유일하게 3개의 다른 메이저 대회 예선전[6]에서 해트트릭(혹은 그 이상)을 작렬했다.현역 시절 부상에 시달렸던 편인데, 1966년 월드컵 직전 포르투갈과의 친선전에서는 왼쪽 발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었고 1970년 월드컵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발목이 골절됐다. 은퇴 사유 또한 1976년 AC 밀란과의 경기에서 입은 부상이 완쾌되는데 실패해서였다.
2019년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에서 선정한 60년대 이후 이탈리아 최고의 선수 베스트 50에서 1위에 올랐다. #
[1]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
[2]
그의 등번호 11번은 구단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3]
그나마
함부르크 SV에서만 뛴
우베 젤러 정도가 우승이 거의 없음에도 역대급 공격수 취급을 받는다.
[4]
이마저 다른 강팀의 최고 득점자가 기본적으로 50골 이상 기록한 것에 비해서 턱없이 모자란다. 이 기록이 얼마나 낮냐 하면, 월드컵 진출 3회 이하(없으면 볼드체)인 유럽 팀 중에서 슬로베니아의
즐라트코 자호비치(35)와 똑같고, 몰타의
마이클 미프수드(42), 북마케도니아의
고란 판데프(38), 북아일랜드의
데이비드 힐리(36), 에스토니아의
안드레스 오페르(38), 웨일스의
가레스 베일(41), 핀란드의
테무 푸키(39)보다 낮은 기록이다. 이탈리아 축구가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한 암흑기와, 그로 인해
수비 지향 축구로 전향한 것 때문에 얼마나 고득점에 취약한지 알 수 있다.
[5]
인테르의 전설적인 선수인
자친토 파케티의 등번호 3번도 구단주였던 그가 사망한 이후 결번처리 되었다.
[6]
유로 1968 예선-키프러스전 해트트릭, 1970년 월드컵 예선-웨일스전 해트트릭, 1974년 월드컵 예선-룩셈부르크전 4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