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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1:25:27

조지아나 스펜서

<colbgcolor=#EED5B7><colcolor=#000000> 데본셔 공작부인
조지아나 스펜서
Georgiana, Duchess of Devonshire
파일:Thomas_Gainsborough_Lady_Georgiana_Cavendish.jpg
이름 조지아나 스펜서
(Georgiana Spencer)
출생 1757년 6월 7일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올소프
사망 1806년 3월 30일 (향년 48세)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데본셔 하우스
배우자 제5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1] (1774년 결혼)
자녀 조지아나, 해리엇, 윌리엄, 일라이자(사생아)[2][3]
아버지 제1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
어머니 마거릿 조지아나 포인츠
형제 조지[4], 헨리에타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결혼과 자녀2.3. 명성2.4. 말년과 죽음2.5. 사후
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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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귀족이자 사교계 인사, 패션 아이콘, 작가, 정치 운동가이다. 영국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인 스펜서[5] 출신이며 제5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의 첫번째 아내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Georgiana,-Countess-Spencer,-and-her-Daughter-by-Sir-Joshua-Reynolds-600x645.jpg
어린 시절의 조지아나. 어머니 마거릿 조지아나 스펜서와 함께

1757년 6월 7일 존 스펜서와 조지아나의 장녀로 태어났다. 후에 여동생 헨리에타, 남동생 조지가 태어났고 유복했던 집안 덕에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조지아나의 부모는 금슬이 매우 좋아서 당시엔 흔했던 정부도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특히 첫째 딸 조지아나를 매우 사랑했다. 1765년 아버지가 스펜서 백작이 되어 조지아나는 '레이디'의 호칭을 얻게 되었다.
파일:Angelica_Kauffmann,_Portrait_of_Lady_Georgiana,_Lady_Henrietta_Frances_and_George_John_Spencer,_Viscount_Althorp_(1774).jpg
1774년 동생 헨리에타, 조지와 함께

2.2. 결혼과 자녀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한 조지아나는 1774년 7월 4일 8살 연상의 5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윔블던 교구 교회에서 가까운 가족들만 참석한 채 조용히 치러졌다. 조지아나의 부모님은 사랑하는 딸을 시집 보내는 게 슬펐지만, 당시 데본셔 공작은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명이었기에 이를 위로삼았다.

하지만 데본셔 공작은 스펜서 백작을 싫어했고, 조지아나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 생활을 하는 내내 불륜을 일삼았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조지아나와 끊임없이 싸웠다. 심지어 그는 결혼 전에 정부에게서 샬럿이라는 사생아까지 두었는데, 조지아나는 이 사실을 결혼한 후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정부가 죽은 후에 아이의 양육은 전적으로 조지아나에게 맡겨졌다.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그녀는 샬럿을 사랑으로 키웠다고 한다.

1782년 조지아나는 바스 시에서 '엘리자베스 포스터'라는 가난한 여성과 매우 친해졌다. 엘리자베스는 남편과 별거하면서 두 아들과도 떨어져 지내고 있었는데, 이를 딱하게 생각한 조지아나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녀의 아들들까지 함께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낼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데본셔 공작은 엘리자베스와 불륜을 저질렀고 그녀는 데본셔 공작의 정부가 되어 세 사람은 한 집에서 지내게 된다. 다만 엘리자베스와 데본셔 공작이 서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섹스 파트너의 관계였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두 명의 사생아가 태어났다. 엘리자베스는 이후에도 다른 사람과도 성적인 관계에 있었으며 세 사람의 삼각 관계는 사교계의 유명한 가십거리가 되었다.
파일:1187px-Thomas_Gainsboroguh_Georgiana_Duchess_of_Devonshire_1783.jpg
1783년의 데본셔 공작부인

불행한 결혼생활 속에서 조지아나는 1783년 첫째 딸 조지아나와 1785년 둘째 딸 해리엇을 낳았다. 그녀는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는데, 1790년 드디어 아들 윌리엄[6]을 출산하였다.

아들을 낳은 후 그녀는 훗날 영국의 수상이 되는 찰스 그레이[7]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들이 언제부터 사랑에 빠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791년 조지아나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고 몰래 아이를 낳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1792년 2월 20일 그녀는 딸 일라이자를 낳았고 이 아이는 그레이의 가족들에게 보내져서 길러졌다. 후에 조지아나는 일라이자에게 종종 찾아갔으며, 일라이자는 조지아나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일라이자는 후에 자신의 첫 아이 이름을 어머니의 이름을 따 '조지아나'라고 지었다.[8]

한편 프랑스에 있는 동안 조지아나는 아이들을 매우 그리워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데본셔 공작이 찰스와 계속 만나면 아이들을 영원히 못 볼 것이라고 협박했고, 결국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가정에 충실하도록 노력했다.

2.3. 명성

데본셔 공작부인이라는 지위와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던 그녀는 당대 영국의 최고 유명인사였다. 그녀는 여성들의 패션 아이콘이었고, 당시 영국의 왕세자였던 조지 4세,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등의 어마어마한 인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정치, 문학, 과학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문사에서는 그녀의 모든 행보를 기사에 실었다.

정치적으로 그녀는 휘그당을 지지했는데, 여성의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당시 사회에서 조지아나는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는 등 여러 정치 활동을 하였다. 특히 먼 친척인 찰스 제임스 폭스를 위한 선거 운동을 활발히 했다.[9] 그녀의 정치 참여 활동은 후에 여성의 인권과 페미니즘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 그녀는 도박을 좋아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남편이 그녀에게 돈을 주지 않아서 나중에는 30만 파운드[10]의 빚까지 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남편에게 계속 숨겨야 했고 부모님에게 갚아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고 한다.[11]

2.4. 말년과 죽음

데본셔 공작이 통풍에 걸려 그를 간호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아들을 낳은 후에 몇 번의 유산을 겪으며 부부 사이가 원만해지기도 했다. 글을 쓰거나 정치 활동에 관여하며 여생을 보냈고, 전 연인인 찰스 그레이의 아내와도 친분을 쌓았다.

1801년 큰 딸 조지아나가 칼라일 백작과 결혼하였다. 이는 조지아나가 생전에 자기 자녀의 결혼식에 참석한 유일한 사례였다.

40대에 접어들면서 그녀의 건강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황달이 심하다며 불평을 하던 그녀는 종양이 생겼고, 결국 1806년 3월 30일 남편, 어머니, 여동생, 큰 딸 조지아나[12], 엘리자베스 포스터의 곁에서 눈을 감았다. 생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데본셔 공작은 그녀의 사망 후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피커딜리[13]에 모여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유해는 더비의 올 세인츠 교구 교회에 묻혔다.

2.5. 사후

그녀의 죽음 후에야 데본셔 공작은 그녀가 남긴 빚을 알 수 있었다. 그 금액은 현재 가치로 372만 파운드(한화 약 57억 4천 만원)에 달했다. 이것을 본 데본셔 공작의 첫마디는 "이게 전부인가..?" 였다고.[14] 그는 죽을때까지 이 빚을 다 갚지 못해서, 아들인 6대 데본셔 공작이 다 갚을 수 있었다.

데본셔 공작은 조지아나가 죽은 후 엘리자베스 포스터와 재혼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애 둘 딸린 부인에서 사망한 조지아나의 작위까지 가져가 통칭 ‘데본셔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캐번디시’가 되었다.[15] 하지만 데본셔 공작과 엘리자베스 포스터 사이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공작부인이 된 뒤에도 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16] 미천한 사생아 신분으로 남았다.[17]

당연하겠지만 조지아나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호의를 원수로 갚아 아버지와 정부가 되고, 어머니가 죽자마자 공작부인 작위를 꿰찬 엘리자베스를 미천하고 배은망덕한 여자라고 생각해 매우 싫어했다. 결국 1811년 데본셔 공작이 사망하자 조지아나의 장남 6대 데본셔 공작은 엘리자베스에게 돈을 주며 그녀를 쫓아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나의 자녀들과 엘리자베스의 자녀들은 함께 자라서 그런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현재 데본셔 공작 가문은 조지아나의 후손이 맞다, 조지아나의 외손녀인 블랑쉬가 7대 공작이 되는 2대 벌링턴 백작과[18] 결혼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블랑쉬는 남편이 공작이 되기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백작부인이었다.

3. 매체에서

파란만장한 그녀의 인생은 여러 차례 드라마화 되거나 작품에 등장하였다.

[1] 제4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의 장남이다. [2] 찰스 그레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3] Eliza는 엘리자가 아니라 일라이자로 발음하는 게 맞다. [4] 다이애나 스펜서의 5대조 할아버지. [5]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 스펜서 가문이다. 특히 조지아나는 다이애나의 5대조 고모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비슷해서 주목받기도 하였다. [6] 후에 제 6대 데본셔 공작이 된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7] 참고로 얼 그레이(Earl Grey)는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8] 일라이자가 찰스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레이 가문을 방문한 이모 헨리에타는 일라이자가 찰스를 닮은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9] 1784년 총선 때 공작부인이 폭스를 위해 표를 던지는 사람에게 키스를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10]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데본셔 가문에서 다 갚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값이 어마어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 심지어 당시 영국의 왕세자였던 조지 4세에게까지 갚아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12] 당시 임신 중이었다. [13] 런던에 있는 데본셔 하우스가 위치한 거리. 동쪽에는 그 유명한 피카딜리 서커스 역이 있다. [14] 다시 말해서 '빚이 더 많을 줄 알았는데'라는 안심 혹은 허탈함이 반씩 섞인 반응. [15] 엘리자베스도 조지아나랑 같은 백작 영애였다, 조지아나랑 같은 신분 상승을 한 것 [16] 그나마 생전 조지아나의 호의로 사생아일지라도 데본셔 공작의 자식들로 인정받기는 했다. 조지아나는 데본셔 공작이 결혼 전에 낳아온 딸 샬럿도 적자로 인정하고 양육해줬으며, 본부인의 자녀가 아니면 왕의 자식이라 해도 웬만한 귀족 대접은 받기 힘들었을 만큼 적서차별이 심했던 유럽의 귀족사회에서 이런 조지아나의 행동은 샬럿과 엘리자베스 소생의 자식들에겐 정말 운이 좋았던 행동이었다. [17] 비록 데본셔 공작과 엘리자베스 포스터가 결혼했을지라도, 혼인 전에 태어난 자식들은 계속 사생아 취급을 받는게 그 당시 당연한 관례였다. 때문에 조지아나 소생의 6대 데본셔 공작이 상속자 없이 사망한 후에도, 데본셔 공작위는 엘리자베스 포스터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그의 사촌에게 돌아갔다. 엘리자베스 포스터의 자식들이 귀족의 영애/영식에게 붙는 lord와 lady 칭호조차 받지 못했던 건 물론이다. 그나마 이쪽은 이복형제이기라도 했지 그 당시 영국 귀족 사회에서는 사실혼 혹은 불륜 관계였던 부모가 뒤늦게 결혼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동일한 친형제임에도 불구하고 형이나 누나는 사생아인데 동생이 적자라서 동생이 작위를 물려받은 일도 은근히 있었다. [18] 벌링턴 백작은 현재 데본셔 공작 장남이자 후계자인 윌리엄의 예우 경칭이다, 사실 윌리엄은 하링턴 후작이라는 예우 경칭을 써야되는데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쓰던 예우 경칭을 그대로 쓰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