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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6:29:13

조지 말로리

조지 맬러리에서 넘어옴
<colbgcolor=#262626><colcolor=#fff> 조지 말로리
George Mallory
파일:external/36.media.tumblr.com/tumblr_no3pousvGu1qeu6ilo1_500.jpg
본명 조지 허버트 리 맬러리
George Herbert Leigh Mallory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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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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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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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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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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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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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출생 1886년 6월 18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체셔 주 모벌리
사망 1924년 6월 8일 ~ 6월 9일 (향년 37세)[1]
히말라야산맥 에베레스트 북쪽
직업 산악인
복무 영국 육군
1915년 ~ 1918년
병과 포병
최종 계급 중위 (영국 육군)
가족 배우자 루스 딕슨 터너 (1914년 결혼 / 1892~1942)
장녀 프랜시스 (1915~2001)
차녀 베리 (1917~1953)
장남 존 (1920~2011)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
3. 논란4. 75년 만에 발견된 시신5. 여담

[clearfix]

1. 개요

기자: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는 거죠?(Why did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
말로리: "산이 거기에 있기에(Because it is there)"[2]
1923년 3월 18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 기사 원문(PDF))
[navertv(43994253)]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07부 - 극한의 도전자들中 [3][4]

영국 산악인. 그가 유명해진 것은 "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정복한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논란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이 말을 했는지 아는 이는 잘 없지만 말 자체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바로 위 등산에 대한 최고의 명언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20대 초반부터 등산에 나섰으며 1910년대에는 몽블랑이라든지 유럽 여러 산을 등정했다. 루스 터너(Ruth Turner 1892~1942)와 1914년 결혼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육군 장교로 지원하여 포병 장교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정에 지원하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ndy_Wollaston.jpg
1921년 영국 에베레스트 등정대 사진(뒤에서 가장 오른쪽이 말로리)

말로리는 1920년대 이루어진 3차례의 영국원정에 모두 참가하였다. 하워드 베리를 리더로 하는 1차 등정대는 에베레스트 지역 탐사에 주 목적을 두었고, 1922년 브루스 장군을 대장으로 한 2차 등정대는 등정에 실패하였으며, 1924년 에드워드 노튼의 3차 등정에 참가한다.

2.2.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

찰스 G. 브루스(Charles G. Bruce/1866~1939) 육군 준장을 원정대장으로 한 3차 등정대는 브루스 장군의 건강악화로 에드워드 펠릭스 노튼(Edward Felix Norton, 1884~1954) 육군 소령이 원정대장 업무를 인수받았으며, 말로리가 등반대장을 맡게 되었다. 1924년 6월 1일, 원정대의 존 제프리 브루스(John Geoffrey Bruce, 1896~1972) 육군 대위와 말로리가 1차 등정에 나섰지만 눈보라로 인하여 결국 포기해야 했다. 다음날인 2일에는 등정대 다른 멤버인 에드워드 노튼과 하워드 섬머벨(Howard Somervell,1890~1975)이 2차 등정에 도전했으나 이들은 8,611m에서 포기해야 했다. 더 이상 올라갔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2차 등정이 실패하자 말로리는 등정에 산소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산소통은 기술부족으로 무겁고 고장이 많았는데, 워낙 무거워서 그만큼 체력적으로 더 힘들고 위험했다. 당시에는 산소통 1개가 거의 20kg에 가까운 무게였기에 더 많이 가져가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산소통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말로리는 상대적으로 산소장비에 능숙하고 체력이 좋은 앤드루 어빈 (Andrew Irvine, 1902~1924)과 같이 산소통을 메고 3차 등정에 도전한다. 그리고 멤버이며 지질학자인 노엘 오델(Noel Odell, 1890~1987)과 몇몇 셰르파들이 도우면서 6월 4일 등정에 도전했다.
파일:external/mountainworldproductions.com/1924_Everest_Team_at_BC-620x449.jpg
(1924년 등정대) 사진 맨 왼쪽의 벙거지 모자를 쓴 사람이 앤드루 어빈, 그 옆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이 조지 말로리, 옆으로 에드워드 F.노튼, 노엘 오델, 존 맥도널드, 앞은 왼쪽부터 에드워드 오스월드 셰비어, 제프리 브루스(Geoffrey Bruce,1896~1972), 하워드 섬머벨, 벤틀리 비템(Bentley Beetham/1885~1963).

여러 캠프를 두면서 서서히 도전하던 이들은 캠프마다 산소통과 먹을 것과 생필품을 따로 두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필품을 많이 가져갈 수 없었다. 6월 6일, 말로리와 어빈은 먼저 캠프 6(7,900m)까지 올라가면서 거기에 친 천막에서 숨을 돌렸다. 뒤따라온 오델과 셰르파들이 여분의 산소통과 담요, 옷, 먹을 것을 두고 오델과 말로리와 어빈을 놔두고 우선 셰르파들은 내려갔다.

6월 8일 아침, 말로리와 어빈은 정상 도전에 나섰고 남겨진 오델은 캠프 6에서 조금 올라가서 이 둘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후가 나빠서 잠깐 물러선 다음에 서서히 기후가 나아져서 다시 도전했다. 이들은 각자 산소통 2개를 메고 있었으며 캠프 7을 만들 천막 및 가벼운 먹을 것과 여러 장비를 갖추고 올라갔다.

그리고 6월 8일 오후 12시 50분, 안개 속으로 약 8,610m 정도 높이에서 말로리와 어빈이 올라가는 것을 멀리서 오델이 본 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델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 둘이 그래도 정상에 오를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캠프 6에는 산소통 12개를 비롯하여 생필품들이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캠프 6에서 가볍게 점심식사를 마친 오델은 내려와서 캠프 5에서 대기하던 다른 멤버들과 만난다. 그러나 오후 5시가 되어가도록 말로리와 어빈은 내려오지 않았으며 올라갈때부터 끼어있던 안개는 더욱 자욱해져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캠프 5 일행들은 "말로리와 어빈이 캠프 7을 설치한 다음,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말로리와 어빈이 캠프 6까지 내려온다면 최소한 먹을 것이나 여분의 산소통이 있으니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9일 오델과 셰르파 2명은 말로리와 어빈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던 캠프 6으로 올라갔지만 남겨진 캠프 6은 누구도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오델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오델은 셰르파들과 올라가려고 했지만 셰르파 2명은 불길하다면서 올라가길 거부해 할 수 없이 오델 홀로 산소통을 메고 올라가야 했다. 홀로 올라간 오델은 해발 8,200m에 설치된 캠프 7을 발견했지만... 말로리와 어빈이 가져간 천막만이 강한 바람에 반이 찢겨진 채로 휘날리고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어빈과 말로리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6월 10일, 다시 한번 몇몇 멤버들이 캠프 7을 찾아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때는 이미 산소통에 들어간 공기는 소진되고 말로리와 어빈이 가져간 식량은 떨어진지 오래일 시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은 죽었다고 봐야했기에 결국 브루스는 등정을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한다.

6월 11일, 남은 등정대 일행은 내려와서 추도문을 읽고 두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 한편, 1924년 10월 17일, 영국 세인트폴 성당에서 총리와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두 사람의 추도식이 열렸다.

3. 논란

1933년 퍼시 윈 해리스(Percy Wyn-harris, 1903~1979)가 이끌던 영국 에베레스트 등정대는 8,250m쯤 올라가서 피켈이 하나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해리스 등정대도 결국 등정에 실패했지만, 이들이 발견한 이 피켈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 이 피켈은 말로리의 것일까? 아니면 어빈의 것일까?가 논란이 되었다. 이 논란은 이후 피켈에 새겨져있던 모노그램과 동일한 모노그램이 어빈이 평소에 사용하던 단장에서 확인되면서 어빈의 피켈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말로리와 어빈은 당시 소머벨의 카메라[5]를 빌려 갔으므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갔다면 반드시 사진을 찍었을 테고 이게 발견된다면 말로리와 어빈이 세계 최초로 정상에 올라갔을 것임이 증명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선 두 사람의 마지막 목격자였던 오델은 이 둘은 틀림없이 등정했으며 내려오던 길에 사고를 당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에 나오듯이 오델은 1987년 만 97살까지 살면서 1924년의 등정대원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는데[6] 죽을 때까지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오델이 말로리와 어빈이 오르는 것 보았다고 주장한 지점은 실제로는 당시 등반이 거의 불가능한 지점이었기 때문에 오델이 지점을 착각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1953년 4월 29일, 비로소 영국원정대의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1919~2008)가 대원자격으로 등반한 최초의 셰르파인인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 1914~1986)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사진을 남기고 무사히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이들이 과연 최초 등정자가 맞는지, 아니면 말로리와 어빈이 먼저 올랐는지가 호사가들의 화제거리가 된다.

영국인의 자존심이 뉴질랜드인과 세르파의 등정을 인정 못해서 벌어지는 논란이라고도 하나, 이는 귀를 기울일 가치가 없는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로버트 스콧과 같은 선례가 있다 보니 이런 편견이 생길 수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힐러리와 노르가이의 등정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과 맞물려 '일개 섬나라로 몰락한 영국'이 아닌 '여전한 대영제국'의 승리라는 컨셉을 위해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영국 정부와 원정대 간의 조율 하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말로리가 등정에 성공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이후 수십 년 동안 힐러리의 등반 성공 시까지 논란일지언정 잊혀지지 않고 계속 회자되었던 것 자체는 대영제국의 자존심이라는 후광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세계 3대 극점 중 미국(피어리)[7]과 노르웨이(아문센)에서 이미 북극과 남극을 빼앗겼기에, 에베레스트라도 "아마 정복했을...걸?"이라는 식으로 주장하며 사실상 인정받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4. 75년 만에 발견된 시신

"8,100m 지점에 웬 영국인 시체가 있었다. 영국인인지 어찌 아냐고? 당연히 유니언 잭이 다 찢어지긴 했어도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채로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시체는 별것도 아닌지라 대충 보고 지나쳤다."
ㅡ 왕홍보.
그리고 세월이 지나 1975년 중국의 산악인 왕홍보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당시,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시체를 목격했다.[8] 왕홍보는 4년 후인 1979년, 에베레스트 등정과정에서 만난 일본 등반대의 하세가와 료텐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다음해 일본 등반협회가 이를 다시 에베레스트 역사가인 톰 홀젤에게 알려주며 당시 발견된 시체가 혹시 말로리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이 나왔다. 안타깝게도 왕홍보는 하세가와 료텐과 만난 바로 다음날 눈사태로 사망했고, 1975년 당시 중국 등반대의 다른 등반가들은 이 시신을 보지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하세가와 료텐 또한 후에 에베레스트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1980년대부터 말로리의 시신을 찾기위한 등정대가 조직되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9년 5월 1일 오전 11시 45분. 에릭 시몬슨이 이끌던 조지 말로리 시신 수습 작업 등정대에 참가한 미국 산악인 콘래드 앵커는 에베레스트 북동릉 8,138m 지점 약 30도 경사진 곳에서 앞으로 넘어진 채 숨진 모습의 시신을 발견했다. 앵커는 시신의 옷 주머니에서 손수건에 곱게 싸인 편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조지 말로리의 것이었다.[9]

BBC가 스폰서로 참여해서인지 BBC는 특종으로 이걸 보도했고 생생하게 방송 카메라로도 시신이 나왔다. 추운 기후인지라 75년이나 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시신은 제법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얼핏보면 이건 무슨 마네킹이 아닐까 하는 형체로 남아있었는데, 옷이 찢어져 노출된 피부가 오랜 세월 강한 직사광선에 탈색된 것으로 보인다. 한 쪽 다리는 부러져서 뼈가 노출된 상태였는데, 이는 사망 후 미라화가 된 후 부러진 게 아니라 사고를 당했을 때 심각한 골절상으로 그가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대원들은 조지 말로리를 감고 있던 로프를 제거한 후 주머니에서 고글 나이프, 가위, 성냥, 행동식 양철캔, 손가락부분을 잘라낸 장갑, 보겔손목시계, 고도계, 등산화 등을 회수했다. 그리고, 주변의 흙과 돌을 모아 시신을 덮어 간단히 무덤을 만들었다. 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 촬영 후 무덤을 만들어 돌과 흙으로 덮었기 때문에 현재는 근처를 지나가도 무덤과 비석을 볼 수 있어도 시신을 볼 수는 없다. 흙에 파묻혀 있던 얼굴 부분은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파내거나 찍지 않았다. 시신을 발견했지만 수습하지 않고 현지에 그대로 묻은 것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망한 나라에서 장례를 마치고 비석을 세우는 영국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10] 물론, 시체가 수백킬로그램 무게로 꽁꽁 얼어서 도저히 가지고 내려올 수 없다는 점도 있긴 하다.

엄홍길만 해도 2005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하산 도중 사망한 후배 박무택, 백준호, 장민의 시신을 나중에 재방문 하여 발견했음에도 너무나 무거워 겨우 양지바른 곳에 시신을 옮겨가 직접 돌무덤을 만들어 묻어주었을 뿐이었다. 엄홍길이 이전에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여 듣던 라인홀트 메스너조차도 너무나도 위험하다, 나 또한 친아우 귄터를 눈사태로 잃어버렸지만 시신을 찾는다는 걸 포기했다며, 추운 높은 산에서 조난당해 죽은 시체는 수백킬로그램이 넘게 무거운 몸이라 그런 걸 셋이나 가지고 내려오다간 다른 사망자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할 정도였다.[11] 그만큼, 이런 8000미터 이상급에서 시신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고 위험하다.

그리고 관심거리였던 카메라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영상에서와 같이 말로리가 리더였고 어빈이 보조였기에, 사진을 어빈이 찍고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어빈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는 말로리와 어빈은 실패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원인은 1920년대의 기술력 부족을 꼽는데 현대에 비해 너무나도 장비가 부실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동영상에서 발견된 말로리가 입었던 옷의 재질은 개버딘(Gabardine)으로 날실에 양털, 씨실에 무명을 이용해 만든 직물이다. 유래는 영국의 버버리 사에서 트렌치 코트의 원단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 코트는 현대 정장의 조상격이며 많은 남성용 의복을 파생시킨 군복이었다. 정복은 과거엔 전투복이었고, 정복 셔츠는 전투복 상의, 정복 바지는 전투복 바지, 정복 겉옷은 야상, 정복 구두는 스웨이드 전투화, 정복에 입는 롱코트는 스키파카의 직계 조상이다. 재질은 고어텍스로 바뀌는 등 몇 가지만 달라졌을 뿐 사실 큰 차이는 없다. 조지 말로리를 포함한 탐험대는 최첨단 등산복을 입고 등정에 올랐다. 단지 에베레스트가 당대의 기술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였을 뿐. [12]

그 밖의 실패 이유로 꼽히는 점은 산소 장비, 그리고 '극지법'과 극지법의 발전이다. 또 하나는, '세컨드 스텝을 돌파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이야 사다리를 설치해서 쉽게 올라가지만 티베트 방면으로 초등정을 했던 중국팀은 '수많은 대원들이 서로의 어깨를 밟고 고정사다리를 설치하고 나서 올라가는 방법으로 돌파'했었고 이후 이들은 '사다리 없이는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공언했고 오랫동안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13][14]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때, 조지 말로리와 24년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등반사에 가장 뜨거운 논란의 주인공으로 남을 자격'은' 충분하다. 덕분에 지금도 여전히 말로리와 어빈이 가장 먼저 올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이후 2024년 10월, 말로리와 함께 등반한 어빈의 오른쪽 발 유해가 발견되며 다시 한 번 카메라를 찾을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5. 여담



[1] 시신은 1999년 5월 1일에 발견. [2] 이 문장의 해석에 대해서는 아래 여담 항목 참조. [3] 2017년 12월 16일 방영 [4] 영상 매체의 탄생 이후 꿈을 추구하면서 인류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 도전자들의 모습을 그린 NHK의 다큐 [5] 코닥 사에서 나온 Kodak Vest Pocket Autographic Special 모델 [6] 등정대는 아닌 사람까지 포함하면 일행 사진을 찍던 사진 담당 존 바티스트 노엘(John Baptist L. Noel,1890~1989)이 99살까지 살았기에 여기 일원 가운데 가장 장수했다. [7] 다만 로버트 피어리 문서에서 보듯, 현대에는 피어리의 북극점 정복은 부정되는 것이 통설이다. 북극점 정복 또한 로알드 아문센이 최초로 인정된다. [8] 정확히는 두 구를 발견했는데, 한 구는 훨씬 아래쪽인 7000m부근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이 시신은 1930년대에 등정을 시도하다 사망한 영국인 비행사 모리스 윌슨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9] 이때 다행히도 조지 말로리의 자녀 3명 중 2명이 생존해 있었다. 이 중 한 명은 시신이 발견된 지 2년 후인 2001년, 또 한 명은 2011년에 사망했다. [10] 6.25 전쟁에서 전사한 영국군 영연방군 군인들 역시 부산의 재한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11] 놀랍게도 딱 2005년 같은 해에 아우 군테르 메스네르의 시체는 35년만에 눈이 녹아서 밑으로 떠내려왔다. 이걸 현지인들이 발견하고 신고했고 시체는 썩어서 얼굴로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등산화로 라인홀트가 친아우 시신 사항을 확인했다. 베이스캠프에서 화장해 유골은 산에 뿌렸고 유품만 몇가지 추스려 조국으로 가져와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가묘이던 곳에 묻었다. [12] 이와 똑같은 방한복을 입고 남극점에 도전한 인물이 바로 로버트 스콧이었다. [13]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콘래드 앵커가 이후에 직접 등반하여 증명한 바와 같이 이 구간은 사다리 없이 프리클라이밍으로 등반이 가능하며, 말로리의 경우 당대 영국 등반가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프리 클라이밍에 능한 타입이었다. 실제로 콘래드 앵커는 이 구간 등반 후 '말로리의 등반력으로 등반이 가능한 구간'이라고 평가하였다. [14] 반면 말로리에 비해 콘래드는 기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훨씬 여유로운 상황에 있었고, 콘래드는 세컨드 스탭에 대한 지리적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말로리는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로리가 등반에 실패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라인홀트 매스너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말로리가 등반하던 1924년의 클라이밍 기술과 장비로는 세컨드 스탭은 도전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다 라고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