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청자( 朝 鮮 靑 磁)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청자로서 주 연대는 조선 초부터 중기까지이다. 고려 시대의 고려청자를 계승하였다.2. 상세
일반적으로 청자하면 고려 시대의 고려청자를 떠올리지만 조선 시대에도 백자 이외에 청자 역시 만들었다. 물론 백자에 비해서는 비주류이다. 비슷한 케이스로 고려백자가 있다. 조선청자는 조선 전 시기가 아닌 중반기[1]까지만 만들어졌고 양란 이후에는 소멸되었다. 그래서 그 양도 매우 희소하다.조선청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말기의 고려청자에서 바로 이어지는 부류로 색깔이 탁한 회청자에 상감이나 인화문 등의 칠을 해 분장회청사기로 이어지는 부류가 한 부류이다. 이 경우 고려말의 그것과 조선의 물건이 사실상 정확한 구분이 어렵다. 다만 여말선초에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고려적인 모습에서 점점 조선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도자기에 명문으로 연도를 적은것들이 있어 연대파악에 용이하다. 다만 어느 시점 이후에는 그런 모습이 사라진다. 나중에는 분청사기화 되고 계보가 끊어진다.
다른 하나는 아예 조선만의 독자적인 것으로 청자토가 아닌 백자토를 태토로 하며 거기에 투명한 백자유가 아닌 철분이 함유된 불투명한 청자유를 시유한 부류이다. 그래서 백태청유자(白胎靑釉磁)라고도 한다. 사실 본격적인 조선청자라 한다면 이쪽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성형 형식도 조선 시대 백자를 만드는 스타일에 색깔만 다른 셈이라 모양이 고려 시대의 매병이나 다완 같은 것과 차이가 크다. 색깔만 희지 않을 뿐 조선백자와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굽이 높아지고 굽바닥에 유약도 바르지 않았다. 다만 백토에다가 청자유만 바른 것이다보니 색깔이 상대적으로 연하다. 고려청자의 진한 푸른색에 비한다면 흰빛이 감도는 엷은 푸른색에 가깝다. 중국 경덕진의 청백자 빛깔을 떠올리면 된다.[2] 조선 청자는 푸른색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문양이 없는 순청자가 거의 대부분이며 형태는 향로 같은 복잡한 형태의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시대적으로 선호가 백자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버려서 그다지 활발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고려의 귀족적이고 다도를 중요히 여기는 문화에서는 청색이 환영 받았지만 숭유억불과 더불어 다도가 도태되고 사대부 선비적 문화가 꽃피우자 단아한 백색이 각광받았다.[3] 더구나 사실 음식을 덜었을때 식욕을 돋구는것은 흰색이 더 낫다. 그래서 실용적인 면에서도 흰색이 청색을 눌렀다. 현대에도 식기 색깔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흰색계통이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화려해보이는 청자와 비교해 소박해 보이고 비교적 흔한 백자가 만들기 쉬어 보일수도 있으나 실은 백자가 청자보다 만들기 더 어려운 하이테크 기술이다. 실제로 도자사에서도 도자기 중에 청자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백자가 나왔다. 고려시대에도 백자를 안 만든게 아니고 실은 못만든것에 가까웠다. 백자를 만들려면 청자보다 가마온도를 100도 더 올려야 되는데다 태도도 철분이 없는 백토를 써야되므로 못구하면 따로 철분을 빼주는 수비작업을 하던가 백토를 따로 찾아야했다. 우리 주변에 흙색깔이 철분이 함유된 황토가 흔한지 아님 백토가 흔한지 생각해보면 어느것이 귀할지 이해가 빠를것이다. 청자는 회갈색의 태토에 철분이 함유된 유약을 써서 표면에 유리질을 산란시켜 푸른색을 내고 백자는 백토에 투명한 유약을 써서 흰색을 낸다. 기술적으로도 청자가 백자보다 정점에 선것이고 실용적으로도 백자가 청자에 비해 태도가 치밀하여 더 고르고 잡물이 없으며 더 단단하여 깨지지 않았으며 유약에 있어서도 박리가 덜하였다. 그래서 선호도가 백자가 청자를 압도하니 백자의 세상이 열리고 청자는 멸종의 길로 들어섰다. 이점이 조선백자가 고려백자보다도 더 마이너하게 되는 원인인데 고려시대에는 실은 고려 초기 부터 말기까지 백자는 조선시대에 비교하면 그 질이 떨어져 흰색을 완전히 구현해 내지는 못할지언정 꾸준히 생산은 되어 왔고 선호도도 높아[4] 중국에서 수입해 오기까지 해왔다. 그런데 조선에서 청자는 못 만든게 아니고 안 만든것인데다가 딱히 수요도 없으니 당연히 수입 같은것도 안했다.[5] 정설은 없지만 조선시대 만들어진 청자는 국가에서 특별한 목적 아래에 관요를 통해 어느 시기에만 제작된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얼마없는 고려백자보다도 조선청자가 훨씬 더 드물다. 그나마 만들어진 청자도 사실 따지고 보면 백자가마[6]에서 만들어 지는 백자 중에 일부만 청자유 바른것에 불과한 것이니 사실상 백자 만드는데 끼어서 몇개 만든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에는 ‘ 사옹원 사기는 대전(大殿)에는 백사기를 사용하고 동궁(東宮)은 청자기를 사용한다.’는 구절이 있어 궁중에서 왕은 백자를 쓰고 세자는 청자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청자보다 백자를 더 귀하게 보고 한급 위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기사다. 또한 세자는 미래권력이므로 해뜨는 동쪽에 거주해 동궁이라 하는것과 같이 젊고 어리다는 뜻에서 푸른색을 썼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7] 조선청자의 생산지는 경기도 광주 부근 관요 가마로 한정된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무렵부터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실전되었다.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는데 구한말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일본 총리가 고려청자를 고종황제에게 보여주자 고종은 이 도자기가 우리나라의 도자기가 아니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조선에서 청자는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된 것이다.[8]
백자에 밀려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대중매체에서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 주인공이 조선에서 수입할 주요 교역 물자 중 하나로 지정해서 당시 왕이었던 명종이 구해 주었다 정도로 언급된다. 그래도 이 세계관에서는 잉글랜드와의 무역품이 되었기에 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실전될 일은 없을 듯하다.
3. 조선백자 고미술품 목록
3.1. 국가 지정 문화재
3.1.1. 국보
3.1.2. 보물
3.2. 시도 지정 문화재
3.3. 일반 동산 문화재
3.4. 해외 소재 문화재
4. 같이보기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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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백자 | 조선백자 | ||||
청화백자 철화백자 |
[1]
추정 시기는 17세기이다.
[2]
물론 도자기라는 게 청자나 백자의 색도 따지고 보면 가지각색이듯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청색이 상대적으로 강한 것도 있다.
[3]
참고로 도자기의 본고장인 중국도 기술적인 발전도에 따라 진나라 내지는 한나라때 청자가 나오고 남북조때 백자가 나왔으며 한족의 송나라때 청동기색이라고 청자가 우위였다가 유목민족 원나라때 우유색 내지는 태양의 빛깔이라고 백자가 우위를 잡았다. 그리고 이후에 청화백자가 크게 발전하는 양상을 띄었다.
[4]
백자는 왕실에서 제기용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5]
참고로 중국이나 일본은 조선시대에도 청자를 꾸준히 생산했다. 물론 대세는 이들 나라에서도 백자였고 조선과 마찬가지로 특히
청화백자가 흥했다.
[6]
당연히 소성온도도 백자에 맞추어져 있다.
[7]
청색과 동궁을 동일시한 실례는 자기뿐만 아니라 복식등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왕 입장에서 볼땐 좌측에 있으니 좌청룡으로 청색이 어울린다.
[8]
다만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청자의 비색을 내는 방법이 복원되어 다시 청자를 만들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