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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21:00:53

조동희(고려)

趙冬曦
(? ~ 1170)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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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중기의 인물. 무신정변을 진압하려다가 체포당한 이후 살해당한다.

2. 생애

의종 18년(1164) 정7품 남반인 차내전숭반(借內殿崇班)으로서 차우시금(借右侍禁) 박광통과 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조동희 등은 조공품으로 놋그릇을 바쳤으니, 송효종이 도강(상인) 서덕영을 통해 향이 가득 찬 금은합을 하사품으로 전해준 것에 보답한 것이다. 송에서 돌아온 뒤에는 의주판관으로 부임한다.

일찍이 서북면에는 병마부사 김광중이 멋대로 과의 국경을 넘어 방어 시설과 둔전을 세운 일이 있었다. 금 황제가 고려에 공문을 보내 왕명에 따른 것인지 국경의 관리가 멋대로 행동한 것인지를 물었고, 의종은 조사를 마친 뒤 점거한 땅을 금에 돌려줄 것을 명령한다. 서북면병마사 윤인첨은 영토를 잃는 것을 수치로 생각해 항명했으나, 의종 19년(1165) 결국 인주(麟州=의주)와 정주(靜州, 의주 남쪽)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정주별장 원상 등 고려군 16인이 포로로 잡힌다.

서북면병마부사 윤인첨은 무력충돌의 원인을 조사하다 보면 자신의 항명 사실이 드러날 것을 걱정했고 이에 의주판관 조동희를 찾는다. 조동희는 윤인첨의 비밀을 지켜줬고, 금 대부영에 포로 송환을 요구하는 공문이 보내져 이튿날 전원이 송환된다. 갈등 원인 제공자 윤인첨은 나라에서 힐난을 듣는데도 변명을 늘어놓으며 사실 보고를 피할 수 있었다.

의종 22년(1168) 탐라에서 민란( 양수의 난)이 일어나니 탐라안무사에 임명된다. 조동희는 탐라에 이르러 백성들을 효유하고 양수 등이 스스로 항복하게 했으며, 주모자를 처형한 뒤 곡식과 포백을 나눠 도민들을 위로한다. 난을 진압한 공을 세운 조동희는 병부시랑에 임명된다.

의종 24년(1170), 연기지(延基地)를 살피러 서해도에 나갔다가 개경에서 변란( 무신정변)이 일어났음을 전해듣는다. 조동희는 철령을 넘어 동계로 피한 뒤에 무신들을 제압할 병력을 모으려고 했는데, 사나운 호랑이가 길을 막는 바람에 미처 넘어가지 못하고 추격하던 기병에 사로잡힌다. 끌려간 앞에서 주모자 정중부는 조동희가 탐라를 평정한 공이 있다고 해 죽이지 않고 먼 곳으로 유배보냈는데, 유배지로 향하던 도중에 곁에서 지키던 자(守者)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시신은 물에 던져진다.

3. 대중매체



[1956년생] < 태조 왕건>에서 이치 역을 맡은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