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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35:15

조길룡


성명 조길룡(曺吉龍)
본관 창녕 조씨
생몰 1909년 9월 18일 ~ 1991년 3월 8일
출생지 전라남도 능주군 원화순방 읍내면
(현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조길룡은 1909년 9월 18일 전라남도 능주군 원화순방 읍내면(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광주군 광주면 양림리(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거주하였으며, 이후 구례군 간문면(현 문척면) 금정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고, 여수시 봉강동에 거주하기도 했다.

1926년말 항일 학생 비밀결사인 성진회(醒進會)가 조직되었다가 회원 중 반을 옮기는 사람이 생겨 1927년 3월에 형식상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광주농업학교에서는 주경석(朱庚錫)· 유치오의 주도하에 성진회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였는데 이들이 1929년 3월에 졸업하게 되자 당시 4학년 재학 중이던 조길룡은 김남철·이영범(李翎範) 등과 함께 뒤를 이어 교내 조직을 3개반으로 나누고, 각기 반책임자가 되어 사회과학연구 등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그해 6월, 도쿄에서 귀국한 장재성이 성진회 해체 후 이제까지 분산적으로 지속하였던 투쟁방법에 대하여 조직적 활동을 주장하자 그를 비롯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 김상환(金相奐)· 광주사범학교 송동석(宋東錫) 등 광주군 내 각 학교 학생지도자들이 광주군 광주면 양림리 김기권의 집에 모여 '독서회 중앙부'를 조직하였고, 조길룡은 독서회 중앙부의 출판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각종 인쇄물의 인쇄 및 배포를 담당하였다.

한편, 독서회 중앙부는 부원의 1주 1회 회합, 각 학교에 하부조직인 독서회를 조직할 것, 소비조합의 설치 등을 결의하였기에 조길룡은 그해 6월에 김남철· 최정기(崔貞基) 등 광주농업학교 재학생 20여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모여 광주농교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부서를 정하였는데 그는 독서회 대표 겸 재정부 위원의 일을 맡았다.

또한 이 독서회는 회원을 4개조로 나누어 각기 책임자를 두고 조별로 연구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1개조의 조책임자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앞서 독서회 중앙부에서 설치하기로 결의한 소비조합 조직에도 관여하여 그해 6월부터 장재성 및 독서회 중앙부 임원들과 계획, 의논하여 그해 9월에 독서회원의 친목단결 및 재정지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소비조합을 설치하여 임원 및 각 학교 독서회원 등을 중심으로 하여 운영 자본금에 대한 출자를 받았다.

이렇게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조길룡은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광주농교생의 가두시위에 앞장서서 활약하였다.

11월 10일에는 오쾌일(吳快一)·김남철· 김홍남(金鴻南) 등과 함께 장재성으로부터 앞서 3일에 있었던 일을 듣고 박석기(朴錫紀)의 집에 모여 제2차 시위를 계획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 3개 학교가 일제히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학생 대중이여 궐기하라, 검거된 사람들을 우리들의 힘으로 탈환하자,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자, 식민지노예 교육제도를 철폐하자,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조길룡이 인쇄·살포한 것으로 알려진 격문의 내용 #

거사 전날인 11일 밤에는 박기석의 집에서 오쾌일· 이형우(李亨雨) 등 동지들과 함께 학생들에게 배포할 1000여매의 격문을 직접 살포하였다.

그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2월 광주농업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해서는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언도받아 복역하였다. #

또한 독서회 중앙부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에 대해서는 1930년 7월 1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법, 출판법 위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다만 조길룡이 공산당 선언이 적힌 문서를 배포했다는 건에 대해서는 공소 기각되었다. # 이후 1930년 10월 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미결 구류 70일 산입)을 언도받았고 #[1] 이에 항소하여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소 감형된 징역 2년형(미결 구류 228일 산입)이 확정되어 # 옥고를 치렀다.

1933년 11월 출옥했다가 1934년 8월 전남노동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재차 체포, 8개월간 구금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는 광복회 전라남도 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1991년 3월 8일 별세하였다.
[1] 1930.12.15 1931.3.16 두 차례에 걸쳐 구류갱신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