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당제의 역사 | ||||
제1정당제 (1789~1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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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정당제 (1856~1896) |
제2정당제 Second Party Syst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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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별 정당 우세 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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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지속 시기 |
1824년 ~
1856년 ( 잭슨 시대 ~ 내전 시대) |
양대 정당 |
, |
제3당 | , , , |
주요 인물 | |
주요 쟁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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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24년부터 1856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정당 구도이다.2. 배경
제1정당제는 연방당 대 민주공화당의 양당제였지만, 연방당은 존 애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존 제이 등 당 지도부가 죽거나 은퇴해 붕괴되었고, 1816년 대선 이후 마땅한 세력을 갖추지 못한채 해체 수순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호감 시대라는, 민주공화당 외에 야당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빅텐트 정당이 된 민주공화당은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1824년 대선은 유례 없는 4파전으로 치러졌고, 출마 후보자 모두가 선거인단 과반수를 얻지 못하며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다. 이때 4등 후보인 헨리 클레이가 2등 후보인 존 퀸시 애덤스를 지지해 그 대가로 국무장관직을 받아내면서 1등 후보인 앤드루 잭슨이 낙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잭슨은 이를 "1824년의 사기" "1824년의 범죄"라 부르며 불복에 나섰고, 민주공화당은 분열되었다.
민주공화당은 애덤스, 클레이 등이 이끄는 반잭슨파와 잭슨, 밴뷰런 등이 이끄는 잭슨파로 나뉘어졌는데, 전자는 휘그당을, 후자는 민주당을 창당하며 제2정당제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후의 전개는 휘그당(미국), 앤드루 잭슨, 헨리 클레이 등의 문서를 참조.
3. 특징
제2정당제 대부분의 시기는 잭슨 시대에 걸쳐 있으며, 2정당제 초반기는 민중 정치를 대표한 민주당의 앤드루 잭슨과 의회 정치를 대표한 휘그당의 헨리 클레이 두 사람의 대결로 정리된다고 할 수 있다. 앤드루 잭슨은 포퓰리즘과 "명백한 운명", 자유무역, 중농주의 등의 진보적 대중주의를 표방한 반면, 헨리 클레이는 엘리트주의, 영토 팽창 반대, 보호무역, 중상주의 등의 보수적 의회주의를 표방했다.이 외에도 존 C. 칼훈, 대니얼 웹스터도 중요 정치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 헨리 클레이와 앞의 두 사람은 각각 중부, 남부, 북부를 대표해 의회에서 활동했기에 "위대한 삼두정"으로 불리곤 한다. 앤드루 잭슨은 1845년, 존 C. 칼훈은 1850년 사망했고 웹스터와 클레이도 얼마 안가 1850년대 초반에 모두 사망하면서 제2정당제의 시대도 저물어갔다.
양당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대등한 당세를 확보했으며, 뚜렷한 지역 구도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는 미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민주당은 농민의 비율이 높았던 남부에서, 휘그당은 식자층의 비율이 높았던 북부에서 지지를 주로 얻는 구도였다.
주요 쟁점은 영토 팽창과 무역 문제로, 영토 팽창에 관해 민주당은 찬성의 입장을, 휘그당은 소극 반대의 입장을 내세웠다. 한편 무역의 경우, 북부 상인들은 자신의 사업이 높은 관세에 의해 보호받길 원했으므로 이들을 대변한 휘그당은 강력한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반면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농민들의 요구에 맞춰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금융의 문제도 불거졌는데 이를 "은행 전쟁"이라고 부른다. 민주당은 중앙은행 설치에 반대했고, 휘그당은 앤드루 잭슨이 폐지한 중앙은행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러나 휘그당은 전반적으로 민주당에 비해 전국적 조직력과 통일된 강령 등이 부족했기에 민주당에 끌려다니는 구도를 계속 보여줬고, 막후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며 휘그당 그 자체를 이끌어온 헨리 클레이가 사망한 1850년대 노예제 문제에 관해 특히 이 점이 두드러지며 정당 자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4. 붕괴
제2정당제의 붕괴는 노예제에 관한 논쟁에서 휘그당이 명확한 입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이루어졌다. 북부 휘그당은 "양심 휘그당원"이라 하여 노예제의 점진적 혹은 급진적 폐지를 원했다. 반면, 남부 휘그당은 노예제도를 사수하자는 입장이었다. 헨리 클레이는 양 측의 갈등을 잘 조정해 1850년 타협을 이끌어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고, 클레이가 사망한지 얼마 안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라는 희대의 정쟁거리가 휘그당을 휩쓸면서 1854년 중간선거를 기점으로 휘그당은 붕괴, 북부 휘그당은 공화당으로, 남부 휘그당은 무지당(미국당)으로 뿔뿔이 흩어졌다.한편 민주당도 존 C. 칼훈의 남부 세력은 1850년 타협에 반대했지만 스티븐 A. 더글러스 등의 북부 세력은 타협에 찬성하는 등 휘그당만큼은 아니어도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줬고, 결국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마틴 밴 뷰런을 필두로 한 등 많은 반노예제 민주당원들이 찰스 섬너, 새먼 체이스 등 반노예제 휘그당원과 힘을 합쳐 자유토지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당의 북부 세력이 큰 분열을 겪게 된다.
결국 1856년 대선은 친노예제 빅텐트 민주당의 제임스 뷰캐넌, 반노예제 빅텐트 공화당의 존 C. 프리몬트, 휘그당 잔존 세력 무지당의 밀러드 필모어 이렇게 3파전으로 치러졌고, 남부는 뷰캐넌, 북부는 프리몬트 지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며 제2정당제는 완벽하게 해체되고 남북 지역 구도가 뚜렷해지는 제3정당제가 등장하게 된다.